미실의 정변에 의해 위기에 몰렸던 덕만이 맹렬히 공세로 전환하던 그 순간, 덕만공주가 찌질해 보였던 때가 있었다. 미실이 당나라의 사자를 맞아 직접 담판하던 때다.


당나라의 사자는 위세를 부리며 황금을 바치라고 했다. 미실은 웃기지 말라며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신국은 당나라와 동급이니 헛소리를 하려거든 이세민이 직접 오라는 식으로 말했다. 미실이 그렇게 신국의 자부심을 지키고 있을 때 우리의 성골 덕만은 ‘우리 아버지가 물려줄 왕자리 내가 찾아먹을 거야’라며 미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과거에 국가의 주인은 오직 왕이었다. 성골만 주권자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국이 어떻게 되건 말건 사실 미실에겐 상관이 없는 일이다. 덕만은 그 점을 들어 ‘당신은 신국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처럼 큰 꿈을 꿀 수 없었다’라며 미실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미실은 그런 덕만이 자신의 목을 조여오던 순간에조차, 남의 것인 신국의 자부심을 지켰던 것이다. 그때 미실은 커보였고, 크게 보이는 것에 비례해 그녀에게 예정된 몰락의 비극성도 커졌다.



- 스스로 몰락한 미실 -


정변 1라운드는 수도권 병력을 확보한 미실의 승리였다. 제2라운드, 즉 그에 대한 역정변은 수도권 병력 지휘권을 탈취하고 화랑병력을 장악한 덕만의 완승이었다. 역시 정변의 기본은 군사력인 것이다. 미실은 마지막 순간 결정적인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거부했다.


국경에 배치된 야전군이 제 발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돌려보낸 것이다. 그 병력을 받아들였다면 정변 3라운드는 미실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미실이 그 기회를 버린 이유는 신국의 안위 때문이었다.


우리가 선조를 우습게 생각하면서 이순신을 성웅으로 떠받드는 것은, 나라의 주인인 선조가 못 챙긴 국가의 안위를 이순신이 자기 목숨을 바쳐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순신은 나라의 주인인 선조에게 갖은 ‘갈굼’을 당했다. 우리는 그런 이순신 장군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마지막 순간 미실은 자신의 사익을 버리고 신국의 안위라는 대의를 지켰다. 그 자신이 신국의 주인도 아니며, 정작 신국의 주인이 자신을 짓밟기 위해 코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성웅 이순신만큼은 아니지만 미실도 위대해보였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이것이 여타 사극에 등장하는 악당들과 미실의 차이다. <대조영>, <천추태후> 등 사극들에 등장하는 귀족 악당들은 모두 소인배들이다. 하나같이 대의를 저버리고 사익만 챙긴다. 이런 자들의 파멸엔 일말의 안타까움도 없다.


이런 이야기들은 작고 찌질하다. 주인공 하나만 위대하고 악당은 모두 소인배 무리일 뿐이라는 단순구도. 이것은 드라마 차원에서 찌질할 뿐만 아니라, 역사 차원에서도 찌질하다. 바로 한국의 역사를 찌질하게 만들기 위해 형성된 식민사관이 이런 식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소인배들이 아귀다툼을 벌려온 역사의 나라로.


그에 반해 적과 우리 편이 모두 대의를 좆는 이야기는 위대하다. 훨씬 크고 호방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한 쪽이 몰락함에 따라 비극적이다. 위대한 비극. 1차적인 불행에 의한 비극성보다 더 여운을 깊게 남기는 비극이다.


미실의 캐릭터는 그런 비극성을 가능케 했다. 이것이 <선덕여왕>이라는 사극의 작품성이 상찬 받아 마땅한 이유다.



- 미실의 또 다른 비극성 -


미실은 성골이 아니라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다 실패한다. 이것도 비극성의 한 요인이다. 덕만은 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신분으로 재벌3세와 같다. 덕만이 내세우는 대의란 것도 상당부분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 기인한다.


그에 반해 미실은 그 위치에 오르기 위해 악전고투를 치러야 했다. 말하자면,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신애가 온갖 고생 끝에 이순재의 집을 사게 됐는데 해리가 ‘안 돼 내 거야’라며 신애를 밀어 쓰러뜨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현대 사회의 일이다. 미실의 불행은 이것보다 훨씬 크고 근원적이다. 신애는 돈을 벌면 이순재의 집을 살 수 있지만, 미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신국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그녀의 운명이니까.


정변을 일으킨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투쟁이었다. 인간은 절대로 운명을 이길 수 없다. 인간은 덧없고 연약한 존재이니까. 거기에 순응하지 않고 투쟁하는 인간은 위대하다. 그런 의지에서 인간의 영웅성이 나타난다.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닥치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그래서 미실은 비극적인 영웅이다.


미실은 최선을 다해 투쟁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대의를 지키며 자신의 한계 앞에서 장렬하게 쓰러졌다. 거인의 침몰이었다. 역사왜곡 논란이 일어나는데, <선덕여왕>은 역사극이 아닌 판타지일 뿐이다. 미실은 그 판타지가 만들어낸 최고의 캐릭터였다. 이 나라의 국경엔 내 피가 서려 있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비극적인 악당, 미실을 추모한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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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생각해도...올해 최고의 캐릭터... 게다가 사극속 최고의 캐릭터였던 장희빈도 뛰어넘을 판..! ㅋㅋ

  2. 하재근님..

    오타..

    "그에 반해 적과 우리 편이 모두 대의를 좆는 이야기는 위대하다."

    좆 -> 좇

    프로이드 슬립은 아니겠지욤?

  3. 덕만... 2009.11.13 00:42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미실이 죽고난뒤 모두 고현정의 연기에 감탄을 하며 모두들 미실을 찬양합니다...
    사람이란게 자꾸 둘이 있으면 비교를 하져
    상대적으로 작아진 덕만이 욕을 먹고 있구요
    헌데 ....물론 작가의 역량인지 계획인지 각본상 미실에 너무 치우쳐 져서
    선덕이 작아지고 당위성도 점점 시시해지고 있네요
    암튼 한가지 간과한게 있어요
    미실은 덕만으로 인해 성장한겁니다
    미실이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이유도 거기까지 였구요
    물론 출신이 좋았다면 훨씬 좋은 성군까지도 가능했을지 몰라도
    덕만이 십오세때 들어와 성장할때까지 미실은
    부자들 즉 기득권세력의 입장에서 자기배만 불리고 자기세력만 키우던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덕만으로 인해서 비로써 꿈을 꿨고
    비로써 주인이자 대의를 꿈꾸데 된거지요
    안타깝긴 하지만

    덕만이 없었다면 미실역시...........

    여전히 서민 배를 갈라 지배를 채우던 상류층에 머물러 배불리 먹고 살다가
    떵떵거리다 죽었을 거란겁니다..

  4. 병정개미 2009.11.13 15:48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덕만...//미실이 분명 자기배를 채우는 귀족들의 영수격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바로 그 점때문에 미실의 몰락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실의 영웅성이 덕만에 의해 발현됐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똑같은 덕만이라는 자극에 다른 악역이라면 더 비열해질 수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미실은 오히려 당당하고 더 멋지게 변해갔습니다. 미실캐릭터의 매력입니다.

    저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솔직히 속함성의 군대를 돌려보낸 미실의 결단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였다면, 즉 소인배였다면, 당연히 하종처럼 그 병력을 이용해 덕만 세력을 물리치고
    그 기세를 이용해 백제도 몰아낼 수 있다는 식의 자기합리화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속함성 맞은편의 윤충이라는 인물이 명장이라는 복선을 깔면서 그게 안통한다는
    전략적 인식과 자신보다 신국을 위한다는 명백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중 상대를 공격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 중 하나가 적대국이 내전중일때이다.
    이 때 공격자가 별볼일 없다면 수습도 가능하지만 전략을 제대로 구사하는 자라면 그 피해는
    괴멸적일것이 자명합니다. 최소한 영토의 상당부분을 적에게 내주게 되겠지요.
    그걸 읽고 미실은 자신이 포기하는 쪽을 택한겁니다.
    자기 자신을 버려 나라의 이익을 취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충분히 영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5. 덕만... 2009.11.13 17:23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저도 영웅적이라 생각되었지요 충분히...
    그리고 이해를 충분히 끌어낼수 있던 캐릭터였고 정말 멋졌습니다

    다만 선덕의 캐릭터가 작가들의 무관심?으로 중심도 없고 매력도 없고
    이요원 자체도 참 많이 깍이는구나 싶어요

    아역때부터 군시절때까지 보면 선덕이란 캐릭터역시 정말 매력 그 자체였는데
    미실 역에 치중되어 선덕이 너무 소홀한거 같더군요
    둘이 같이 살아야될 캐릭터인데...

    작가들이 미실에 너무 치중하는듯..
    선덕이 미실과 얘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던 이유를 충분히 알것같거든요

    조금만 더 일찍 미실이 바뀌었다면ㅇ 천명이 죽기전이라도 바뀌었다면
    미실은 자살과도 같은 정변을 일으킬일이 없었을거란..
    생각이 들어요 미실은 정변초기부터
    자살같은 마음으로 임했던거 같거든요

    게다가
    그런 영웅이 그렇게 죽었던큰이유중에하나는 너무 오래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기득층과 서민을 빨아먹던 탓일겁니다...

    자기 껍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비극과 함께 말이져

    그게
    안타까운거져

    헌데 그걸 깨뜨릴수 있던 선덕이란 인물이 그리 작은게 아니었는데.

    그게 자꾸 간과되고 어느순간 선덕이란 인물이 점점 초라해 지는게
    참 ...실망스러운거에요

  6. 드라마 2009.11.14 18:52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드라마는 드라마로 인식 해야죠. 실제로 미실이 저런것도 아닌데 드라마가 역사를 바꿔놓는다는게 틀린말이 아니군요.

    너무 미실한테만 내용이 치우쳐 있어서. 선덕여왕의 주인공은 미실이라는 얘기까지 나돌았으니까요. 작가의 의도가 무언지 모르겟네요.

  7. 훌쩍 커버린 2009.11.16 14:25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삼국지 연의랑 똑같네요. 선덕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