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드라마 영상 칼럼

악당 미실이 최고의 캐릭터인 이유

 

미실의 정변에 의해 위기에 몰렸던 덕만이 맹렬히 공세로 전환하던 그 순간, 덕만공주가 찌질해 보였던 때가 있었다. 미실이 당나라의 사자를 맞아 직접 담판하던 때다.


당나라의 사자는 위세를 부리며 황금을 바치라고 했다. 미실은 웃기지 말라며 단칼에 잘랐다. 그리고 신국은 당나라와 동급이니 헛소리를 하려거든 이세민이 직접 오라는 식으로 말했다. 미실이 그렇게 신국의 자부심을 지키고 있을 때 우리의 성골 덕만은 ‘우리 아버지가 물려줄 왕자리 내가 찾아먹을 거야’라며 미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과거에 국가의 주인은 오직 왕이었다. 성골만 주권자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국이 어떻게 되건 말건 사실 미실에겐 상관이 없는 일이다. 덕만은 그 점을 들어 ‘당신은 신국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처럼 큰 꿈을 꿀 수 없었다’라며 미실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미실은 그런 덕만이 자신의 목을 조여오던 순간에조차, 남의 것인 신국의 자부심을 지켰던 것이다. 그때 미실은 커보였고, 크게 보이는 것에 비례해 그녀에게 예정된 몰락의 비극성도 커졌다.



- 스스로 몰락한 미실 -


정변 1라운드는 수도권 병력을 확보한 미실의 승리였다. 제2라운드, 즉 그에 대한 역정변은 수도권 병력 지휘권을 탈취하고 화랑병력을 장악한 덕만의 완승이었다. 역시 정변의 기본은 군사력인 것이다. 미실은 마지막 순간 결정적인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거부했다.


국경에 배치된 야전군이 제 발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돌려보낸 것이다. 그 병력을 받아들였다면 정변 3라운드는 미실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미실이 그 기회를 버린 이유는 신국의 안위 때문이었다.


우리가 선조를 우습게 생각하면서 이순신을 성웅으로 떠받드는 것은, 나라의 주인인 선조가 못 챙긴 국가의 안위를 이순신이 자기 목숨을 바쳐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순신은 나라의 주인인 선조에게 갖은 ‘갈굼’을 당했다. 우리는 그런 이순신 장군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마지막 순간 미실은 자신의 사익을 버리고 신국의 안위라는 대의를 지켰다. 그 자신이 신국의 주인도 아니며, 정작 신국의 주인이 자신을 짓밟기 위해 코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성웅 이순신만큼은 아니지만 미실도 위대해보였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이것이 여타 사극에 등장하는 악당들과 미실의 차이다. <대조영>, <천추태후> 등 사극들에 등장하는 귀족 악당들은 모두 소인배들이다. 하나같이 대의를 저버리고 사익만 챙긴다. 이런 자들의 파멸엔 일말의 안타까움도 없다.


이런 이야기들은 작고 찌질하다. 주인공 하나만 위대하고 악당은 모두 소인배 무리일 뿐이라는 단순구도. 이것은 드라마 차원에서 찌질할 뿐만 아니라, 역사 차원에서도 찌질하다. 바로 한국의 역사를 찌질하게 만들기 위해 형성된 식민사관이 이런 식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소인배들이 아귀다툼을 벌려온 역사의 나라로.


그에 반해 적과 우리 편이 모두 대의를 좆는 이야기는 위대하다. 훨씬 크고 호방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한 쪽이 몰락함에 따라 비극적이다. 위대한 비극. 1차적인 불행에 의한 비극성보다 더 여운을 깊게 남기는 비극이다.


미실의 캐릭터는 그런 비극성을 가능케 했다. 이것이 <선덕여왕>이라는 사극의 작품성이 상찬 받아 마땅한 이유다.



- 미실의 또 다른 비극성 -


미실은 성골이 아니라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다 실패한다. 이것도 비극성의 한 요인이다. 덕만은 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신분으로 재벌3세와 같다. 덕만이 내세우는 대의란 것도 상당부분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 기인한다.


그에 반해 미실은 그 위치에 오르기 위해 악전고투를 치러야 했다. 말하자면,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신애가 온갖 고생 끝에 이순재의 집을 사게 됐는데 해리가 ‘안 돼 내 거야’라며 신애를 밀어 쓰러뜨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현대 사회의 일이다. 미실의 불행은 이것보다 훨씬 크고 근원적이다. 신애는 돈을 벌면 이순재의 집을 살 수 있지만, 미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신국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그녀의 운명이니까.


정변을 일으킨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투쟁이었다. 인간은 절대로 운명을 이길 수 없다. 인간은 덧없고 연약한 존재이니까. 거기에 순응하지 않고 투쟁하는 인간은 위대하다. 그런 의지에서 인간의 영웅성이 나타난다.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닥치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그래서 미실은 비극적인 영웅이다.


미실은 최선을 다해 투쟁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대의를 지키며 자신의 한계 앞에서 장렬하게 쓰러졌다. 거인의 침몰이었다. 역사왜곡 논란이 일어나는데, <선덕여왕>은 역사극이 아닌 판타지일 뿐이다. 미실은 그 판타지가 만들어낸 최고의 캐릭터였다. 이 나라의 국경엔 내 피가 서려 있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비극적인 악당, 미실을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