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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음악 칼럼

일밤 단비, 눈물이 주룩주룩

 

알면서 당한다는 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까?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새 코너 <단비>를 보며 든 생각이다. <단비>는 이번 회에 물로 인해 고통 받는 아프리카의 마을에 찾아갔다. 아프리카의 처참한 현실을 처음 본 MC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구정물을 그 자리에서 마시는 모습은 너무나 끔찍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장시간 물을 긷는 노동에 참여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더했다. 하루 종일 노동하며 사는 17세의 엄마는 <단비>팀으로 인해 모처럼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돈이 없어 우물을 파지 못한다는 그들에게 우물을 선물하기 위해 <단비>팀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절박한 환호로 제작진을 맞았다. 주민들의 그런 환대를 맞으며 한지민은 마침내 고개를 돌리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현지 자원봉사자조차도 울음을 터뜨렸다.


이들의 안타까운 처지, 그리고 이들과 <단비>팀이 만났을 때의 감동은 너무나 강렬해서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뜨거운 감동의 눈물이었다.



- 정공법의 위력 -


<단비>를 보기 전에 이미 방어막을 친 상태였다. 틀림없이 아프리카 주민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이용한 감동코드로 눈물을 쥐어짤 것이라고 예상됐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감동모드가 썩 반갑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요즘 감동이 너무 상업적으로 흔하게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춘불패>에선 자꾸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찾아다니며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강심장>도 최근 들어 눈물을 쥐어짜고 있다. <1박2일>이 휴먼 감동코드로 인기와 호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후로 감동의 홍수가 몰아닥치고 있다.


어차피 상업적인 기획이라면 감동과 걸그룹의 노출, 엉덩이춤 사이에 차이가 뭐란 말인가? 감동의 지나친 상업화는 진정한 감동의 의미를 망가뜨리면서 모든 것을 희화화할 우려가 있었다. <단비>도 그 컨셉이 너무나 뻔했다. 요즘 유행하는 두 가지 코드를 그대로 배합한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개고생 + 훈훈한 감동’


기획안만 봐도 ‘어때, 재밌지? 훈훈하지? 눈물도 나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감동받지 않을 테야’라고 방어막부터 치고 프로그램을 봤던 것이다.


하지만 <단비>는 ‘미존’을 찔렀다. 타자를 미치게 하는 코스. 손도 못 대고 스트라이크를 먹는 속수무책의 코스. 혹은 ‘알존’을 찔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알면서 당하는 코스. 워낙 공이 위력적이어서 뻔히 스트라이크라는 걸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말이다.


정공법의 위력이다. 감동코드가 나오리란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단비>가 느끼게 해 준 감동의 힘이 워낙 강력해 말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백기를 들고 프로그램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힘의 근원은 진정성에 있었다.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것이 단지 상업적 기획으로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MC들의 충격과 안타까움이 진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결국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 더 넓은 측은지심이 되기를 -


난 기본적으로 아프리카나 제3세계의 참상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극히 부정적이다. 아프리카의 기아는 1990년대에 화장품 광고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들의 이미지가 워낙 충격적이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어서 모두가 손쉽게 그 이미지를 이용한다.


제1세계에서 아프리카 기아의 이미지를 내세우며 떠들썩한 기부운동을 벌인 것이 1980년대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나아진 것은 조금도 없다. 진정으로 제3세계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선 기부가 아닌 다른 방식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단비>의 감동, 그리고 눈물은 시청자들에게 ‘측은지심’이라는 정서를 일깨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한국사회는 요즘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면서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 지나친 경쟁과 불안이 모두를 다급하게 해 자신의 스펙, 자신의 출세, 자신의 재테크, 자신의 성적 등에만 매달리는 차가운 한국인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단비>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이들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며 흘린 뜨거운 눈물은, 바로 우리 가슴에 내린 ‘단비’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런 측은지심이 바로 ‘인’이라는 이상적 인격으로 가는 실마리가 된다고 맹자는 지적했었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며 자극된 측은지심,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 연민의 마음이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아프리카의 모습은 바로 우리 윗세대의 모습이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우리 윗세대는 초인적인 노동으로 우리에게 현재의 풍요를 넘겨줬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떠안은 것은 자식 세대의 멸시와 노년의 빈곤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빈곤이 우리 노인들에게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돈이 없이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삶터에서 처참하게 쫓겨나기도 한다. 만약 물이 산업화돼 물값이 올라간다면 깨끗한 물조차 못 먹는 아이들이 이 땅에도 나타날 것이다. 측은지심은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아픔들에게도 확장돼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단비>는 모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한 예능프로그램이었고, 비슷한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교양 프로그램과 달리 재미까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부활에 기대를 갖게 했다. 지옥에 빠졌던 <일밤>의 귀환이 반갑다.


* 추가 : 아프리카 사람 면전에서 대놓고 그들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만큼은 (힘들겠지만)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