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능 음악 칼럼

남보원, 찌질이들의 꼴사나운 투정

 

얼마 전 <미녀들의 수다> 루저 사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었다. 하나는 루저라는 단어가 낙오의 공포에 시달리는 대중의 심장을 강타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된장녀’에 대한 혐오감, 원한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남성들이 가장 혐오하는 대상이 된장녀가 돼가고 있다. 된장녀라 함은 과분한 소비생활을 하는 여성, 남성의 경제력에 기대기만 하는 여성, 경제적인 요구수준이 지나치게 높은 여성 등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문제가 된 <미녀들의 수다> 방송분에서는 ‘된장스러운’ 내용이 많았다. 순수하고 소박하고 나긋나긋한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보이는 여대생들의 화려한 이미지부터가 된장스러웠다. 이런 분위기는 남성들의 쌓인 원한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 모두가 공격목표가 되지 않은 건 그들이 결정적인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 180센티미터와 루저 발언을 한 여대생만 결정적인 꼬투리를 잡혔다. 루저라는 단어에 윤리적인 문제가 있고, 180센티미터라는 기준이 워낙 턱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성의 이런 발언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 격이 됐다.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약점을 잡혔기 때문에 남성들은 ‘옳다구나’하면서 광란의 분풀이를 해댔다.



 

- 된장질해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


최근 <개그콘서트>의 ‘남보원’이라는 코너가 화제다. 이 코너의 원 제목은 ‘남성인권보장위원회’다. 제목부터가 찌질하다. 한국사회는 남성중심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인권보장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이건 마치 흑인이 차별받는 백인중심사회에서 백인들이 ‘백인인권보장위원회’를 만든 것과 같은 일이다. 이보다 찌질할 순 없다.


이런 찌질함은 루저 사태 때도 나타났었다. 당시 남성들은 그 여대생이 외모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고, 인격을 능멸하는 천인공로할 일을 저질렀다고 궐기했는데, 사실 우리 사회에서 외모차별의 원조는 바로 남성들이었다. 남성은 얼굴, 가슴, 엉덩이, 허벅지 등으로 여성의 신체를 분절해 차별하는 행위를 일삼아 하는 존재들이다. 남성들의 차별 행태엔 그렇게 분노하지 않았으면서 여대생의 발언에 민란을 일으킨 것은 가희 희대의 찌질함이었다. 아무튼.


‘남보원’은 요즘 인기다. 많은 사람들이 ‘남보원’의 내용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건 바로 된장녀에 대한 증오 때문이다. ‘남보원’은 된장녀가 꼴 보기 싫은 남성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


영화표를 남자가 샀으면 팝콘값이라도 여자가 계산하라라든가, 왜 비싼 호텔커피를 먹으며 계산서는 남자에게 맡기냐라든가, 왜 동네노래방 놔두고 럭셔리노래방을 가야 하냐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출연자는 ‘여성여러분 그렇게 살아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비웃는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여자들이 밥을 사는 그날까지 남자들이여 일어나라!’는 선동으로 끝을 맺는다.


- 된장녀는 왜 공포일까 -


남성들이 점점 된장녀들을 혐오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남성들은 가난해졌고, 고달파졌다. 청년의 빈곤을 상징하는 단어들은 많다. 청년실업, 88만원세대, 고액등록금, 비정규직 등이 그것이다.


그 기간 동안 한국사회의 소비수준은 더 높아졌다. 옛날엔 학교 앞 분식집, 빵집, 주점 정도에만 가도 별 무리가 없었는데, 이젠 스파게티 레스토랑이 있고 후식으로 스타벅스가 기다리며, 와인을 마셔줘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머니 사정에 따른 선택의 상하폭이 훨씬 커졌다. 이에 따라 스트레스도 커졌다.


한편 TV는 상층의 소비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게 계속해서 바람을 잡았다. 일은 안 하고 럭셔리한 소비와 로맨스만 벌이는 트렌디 드라마가 이런 바람을 선도했으며, 발에 걸리는 게 재벌이거나 실장님인 드라마들이 대세를 굳혔다. 그에 따라 여성들의 기대수준은 점점 높아졌다.


남성들이 빈곤해진 기간 동안 여성들의 요구가 더 높아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에 대한 불만이 10여 년간 누적된 결과가 루저 사태라든가, ‘남보원’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 여성탓은 찌질하다 -


물론 여성에게도 문제는 있다. 이대 앞 스타벅스가 한국 여대생을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라는 것만 봐도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여성들이 결혼하고 나면 자식을 입시전쟁의 전사로 내모는 괴물 학부모가 되며, 아파트 투기바람을 선도하기도 한다. 자기만 아는 된장녀에서 자기 가족만 아는 아줌마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사회적 시야가 좁고,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만을 챙기는 듯한 느낌을 준다. 왜 그럴까? 남성과 여성의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일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훈육 탓이다. 남성은 어렸을 때부터 국가공동체를 책임질 것을 요구 받는데 반해, 여성은 자기 한 몸 잘 건사해 좋은 신랑 만나 자식과 남편을 잘 뒷바라지할 것을 요구 받는다.


그런 시스템을 만든 것은 여성이 아니다. 한국의 시스템은 모두 남성들이 만든 것이다. 남성들이 여성을 사회에서 밀어낸 것을 상징하는 것이 5만 원 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이다. 여성의 사회적 시야나 책임감이 부족해 보이는 것을 탓하려면 먼저 시스템을 문제 삼아야 한다. 무작정 여성 탓만 하는 것은 찌질할 뿐이다.


돈 문제도 그렇다. 남성들이 자기의 빈곤만 생각하며 ‘여성들이여 밥을 사라!’라고 하는데 이는 찌질한 투정에 불과하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성평등 순위에서 한국은 115위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고용평등도에서 여성은 남성의 50% 수준에 불과하다. 관리직 비율로 보면 여성은 남성의 8% 수준이다. 뿐인가? OECD 2009년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남녀임금격차 부문에서 당당히 OECD 1위를 했다. 이슬람지역 등을 빼면 그야말로 최악의 여성차별국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인권보장? 찌질하다는 표현도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다. 한국 남성들, 청년들의 처지가 벼랑끝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오락프로그램 여대생 출연자나 여성 일반에게 아무리 분풀이해봤자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남성들을 빈곤하게 만든 것은 여성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 하층민들이 자신들의 처지가 어려워질수록 얄밉게 복지혜택을 다 가져가는 흑인 탓을 하는 바람에 미국 양극화만 더 심해졌다. 빈곤은 약자 탓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다. 구조를 외면하고 얄미운 여성, 얄미운 된장녀 탓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남성들도 미국 백인들처럼 찌질하다. 남성들의 궐기로 여성이 밥을 사든 안 사든, 지금과 같은 사회 구조는 계속해서 남성들을 루저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