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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동이, 장희빈을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동이> 36회에선 드디어 장희빈 일당의 음모가 밝혀지며 장희재가 잡혀갔다. 시청자들이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몰락의 시작이다. 한동안 전개가 지지부진하다며 <동이>를 탓했던 시청자들은 속이 뻥 뚫렸다며 시원해하고 있다.


그럴 만큼 36회의 전개는 빨랐다. 모처럼 경쾌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힘은 없었다. 이번의 ‘장희빈 대 동이’ 에피소드는 둘 사이의 수싸움으로 불렸다. 그런 대결이 힘을 얻으려면 치밀한 전개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동이>가 보여준 건 장희빈이 일방적으로 앞서가는 모습을 그려주다가 갑자기 동이 측이 단번에 뒤엎는 모습을 아주 빨리 전개시킨 것뿐이었다. 마치 아동용 액션극에서 우리 편이 계속 수세에 몰리다가 갑자기 공세로 돌변해 통쾌하게 적을 무찌르는 모습 같았다. 지나치게 단순했다.


장희빈의 공세부터가 어설펐다. 동이 측 인물들을 모아놓고 집을 뒤진다는 설정은 당대 최고 인기 사극의 전개치고는 너무 안일했다. 그랬다가 갑자기 ‘슈퍼 동이와 그 친구들은 이 모든 걸 다 예측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나오는데, 너무나 손쉬운 반전에 허탈감마저 들었다.


이것이 생각만큼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동이>의 인기를 설명해준다. 선명한 대립구도, 36회에서와 같은 경쾌한 전개로 기본적인 재미는 주지만, 그 이상의 박진감을 느낄 만한 치밀함이 부족하다는 것. 이 때문에 <동이>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이다.



- 완전히 망가진 장희빈 -


악당이 바로 서야 작품이 튼튼해진다. 훌륭한 악당은 작품의 격을 높이기까지 않다. 바로 <선덕여왕>의 미실이 그랬다. 미실에 비견되는 장희빈은 어떤 모습일까? <동이>는 장희빈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겠다고 했었다. 단순한 악녀가 아닌 그 이상의 캐릭터로. 하지만 <동이>의 장희빈은 이번 에피소드에서 완전히 망가졌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은 단순히 권력을 향유하기 위해 왕을 핍박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국가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야말로 신라의 수호자가 될 자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


수도 병력을 끌고 온 덕만군과 대치했을 때, 미실에게 병력이 더 있었다면 그녀가 승리할 수 있었다. 마침 그때 야전군이 미실을 돕기 위해 왔다. 하지만 미실은 도움을 거부했다. 국경을 지켜야 할 야전군이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고 하면서. 그리고 처참하게 몰락했다.


당나라의 사신이 미실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도 미실은 그에게 호통을 쳤다. 미실의 동생은 당나라에 붙어 권력을 안정시키자고 했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신라의 자존심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세민을 모욕하기까지 했다.


<선덕여왕>은 이렇게 악당 미실을 큰 인물로 그렸다. 그래서 미실과 덕만의 대결엔 서사적 비극성이 부여됐고, 흥미진진했으며, 작품의 격도 올라갔다.


이번 에피소드에서 장희빈은 국가의 국경기밀정보를 청국에 팔아넘기려 했다. 숙종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 이 나라까지 넘겨줄 수 있다는 것인가.’


나도 이 에피소드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장희빈을 망가뜨릴 수 있단 말인가’ <동이>는 장희빈을 소인배로 만들었다. 자기 사익을 위해 대의까지 팔아버릴 수 있는 자로 말이다. 최악의 장희빈이다.



- 작품의 격이 떨어지다 -


장희빈만 망가진 것이 아니다. 몽땅 망가졌다. <동이>에선 두 세력이 대립한다. 숙종까지 합치면 세 세력이다. 그런데 이 세력들이 도대체 왜 대립하는지가 제시되지 않는다.


<선덕여왕>, <이산> 등 국민적인 화제가 된 작품들에선 항상 그들이 왜 그렇게 대립하는지, 주인공의 세력이 왜 승리해야 하는지가 분명히 제시됐다. <이산>만 하더라도 서인의 정치이념과 정조, 남인의 정치이념의 차이를 선명히 대립시켰고 그것을 통해 시청자들은 정조를 열렬히 응원하며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동이>에선 서인, 남인, 심지어 숙종까지 무엇을 하려는 사람들인지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왜 동이가 승리해야 하나? 왜 폐비가 복위되어 서인이 집권해야 하나? 남인이 계속 정권을 잡을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그들의 국가적 비전, 즉 ‘대의’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끝없이 나오는 건 각자의 권력욕, 생존의지 뿐이다. 권력 암투와 치정극의 주인공으로 격하된 사람들. 숙종도, 조선의 역사도, 서인도, 남인도, 모두 작아졌다. 모두를 ‘찌질하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작품의 박진감도 훼손됐다. 품격도 떨어졌다.


배우들의 카리스마도, 그 배역의 크기도 모두 <선덕여왕>이나 <이산> 등에 미치지 못한다. 악당의 매력도 그렇다. 대립의 구도도 그렇다. 다만 경쾌한 전개, 화사한 화면,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을 뿐이다.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볼 만한 작품이지만,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