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검사를 다룬 드라마는 많았지만 판사 소재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SBS에서 판사를 내세워 시작된 ‘이판사판’은 그래서 주목 받았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판사들의 세계를 그려줄 거란 기대였다.
시작하자마자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판 역할인 주인공 이정주(박은빈) 판사는 재판 도중 법정에서 법복을 벗어던지며 난동을 부렸다. 피의자의 진술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였다. 성폭행범이 자신의 범행을 ‘성교육’이라고 표현하자 이성 상실 상태가 된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런데 징계도 받지 않았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설정이다.
사판 역할인 사의현(연우진) 판사가 법복을 입을 때 멋있게 보여주려 애쓰는 듯한 영상도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사의현 판사가 이정주 판사에게 반복적으로 ‘옷을 벗으라’고 하는 것도, 나름 운율 효과를 노렸을 진 모르나 억지스러웠다. 드라마를 보노라면 시청자 입장에서 바보가 돼가는 것 같으면서 ‘내가 왜 이런 걸 보고 있나’라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공사판’도 나왔다. 극중에서 한국대 로스쿨 오판 연구회라면서 ‘공사판’(공정해야지, 사기 치지 마, 판결이니까)이 등장한 것이다. 이판사판에 공사판이다. 주말 막장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명 방식이다. ‘이런 작품을 진지하게 볼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당한 설정들이다.
이 정도면 시청자의 맹비난이 쏟아질 법한데 의외로 그렇지 않다. 비난의 목소리가 물론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크지 않다. 심지어 옹호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그 이유가, 또 자괴감을 들게 한다. 현실 판사는 더 황당하다는 게 바로 그 이유다. 난동 부리는 이정주를 두고 ‘저런 판사가 어디 있느냐’는 지적에 ‘뉴스 안 보는구나? 현실 판사는 더 엉망이야ㅋ’라는 답이 나온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조두순이 주취감경 받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판사를 믿지 않게 됐다. 판사는 법과 양형기준에 따라 판결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국민들의 감정과 너무나 동떨어진 결과였기 때문에 불신이 커졌다. 이외에도 관대하게 느껴진 강력사건 판결들로 인해 판사에 대한 신뢰가 크게 무너졌다. 재벌을 비롯한 힘 있는 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것이 더욱 악영향을 끼쳤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의 국정농단, 국기문란 사태 관련자들에 대한 결정도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조윤선 전 장관이 블랙리스트 관련 무죄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추명호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도 대중에게 충격이었다. 이에 수사 받던 국정원 직원이 분노해 더욱 많은 진술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2013년 검찰의 국정원 압수수색 당시의 가짜 사무실 사기극이 드러났다.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이 사이버사령부 인터넷 공작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됐다가 구속적부심으로 석방된 것도 판사에 대한 분노에 불을 질렀다. 매우 이례적으로 사정변경이 없는데도 구속했던 사람을 풀어준 사건이다. 석방 이유 중 하나로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가 제시됐다는 점이 네티즌을 기함하게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국기문란 사태 수사의 와중에 디가우징이라는 생소했던 단어가 일반화 됐을 정도로 증거 인멸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상황이었다. 그럴 때 판사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하니 대중이 ‘억!’할 정도의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판사판’에서 그려진 판사의 모습이 황당하다는 비판에 ‘딱 이만큼만 하라고 해라’라는 옹호론이 나오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이판사판’의 주인공은 행실이 해괴하고 경박하지만 어쨌든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고 약자를 도우려 한다. 반면에 우리 현실의 일부 판사는 해괴하거나 경박하지 않은 ‘점잖은 분’들이지만 막상 판결은 석연치 않다고 사람들이 의심한다. 차라리 행실이 해괴해도 좋으니 판결만은 제대로 해달라는 대중의 염원이, ‘이판사판’에 대한 의외의 옹호여론을 만들었다. 사법부를 바라보는 대중의 심정이 이판사판이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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