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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황상민과 듣보잡, 무엇이 문제인가

 

황상민 교수는 김연아 선수 측이 소송을 제기한 후에 ‘학생이 교수에게 소송을 제기하다니’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의 문제는 여기에 봉건적인 권위주의가 담겨있다는 점이다.

 

공화국의 공론장에서 시민은 모두 평등하다. 대통령이건, 국회의원이건, 교수건, 학생이건, 이런 계급장은 공론장에서 전혀 무의미하다. 모두 1인1표의 시민일 뿐이다. 이게 공화국의 대전제다. (물론 여기서의 학생은 미성년자가 아닌 대학생을 의미함)

 

봉건사회는 어떤 경우에도 ‘너 따위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똑바로 뜨느냐’, 이런 식의 차별이 통용됐었다. 공화국에서 이런 차별은 통하지 않는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대학생들이 마지막 강의를 하던 정원식 교수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던진 일이 있었다. 정원식 교수는 그 전에 문교부 장관을 했었고, 이번엔 국무총리가 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정원식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건 정치적 행위였고, 단순 폭행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와 언론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히 학생이 스승을 폭행하다니, 패륜이다!’

 

‘학생 스승’ 논리가 이 학생들을 패륜으로 몰고 가면서 엄청난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이들은 거의 연쇄살인범 수준으로 사회적 단죄를 받아야 했다. 나중에 2006년이 됐을 때에야 이 학생들은 명예회복 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배경에 대해 위키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군사정권의 영향과 유교적 권위주의, 성리학적인 가치관이 일부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건적 권위주의 때문에 학생들의 행위를 시민의 정치행위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과도한 ‘위 아래’ 의식은 구시대의 잔재다. 그런데 황상민 교수는 2012년에 ‘감히 학생이 교수에게’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다시 반복하자면 일단 공론장으로 나오면 우리는 모두 평등한 시민이다. 교수-학생의 권력관계는 강의실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황상민 교수는 특히 방송을 하는 사람이다. 방송에서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잘못된 발언을 하고서는 ‘난 교수니까 학생은 토달지마’ 이런 식이면, 국민은 높으신 분 혹은 연장자의 방송을 얌전히 경청하기만 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듣보잡도 문제가 있다. 변희재더러 듣보잡이라느니, 변듣보라느니 하면서 무시하는 게 유행인데, 공론장에서 그 누구도 듣보잡이라는 무시를 당해선 안 된다. 이건 ‘너 따위가 감히’라는 봉건적 논리에 다름 아니다.

 

누가 잘못된 말을 했으면 그 사람이 말한 내용 그 자체에 대해서만 비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 사람의 인종을 거론하거나, 출신 지역을 거론하거나, 학벌 등을 거론하는 건 봉건적 사고방식이다. 봉건사회에서는 발언이나 행위의 내용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듣보잡의 경우는 발언한 사람의 지명도를 가지고 ‘너 따위가 감히’라고 놀리는 것이다. 이건 우리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 대부분의 시민은 명망가와 비교하면 듣보잡이다. 이런 논리라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의 발언은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듣보잡의 말이니까.

 

공화국에선 황상민 교수의 ‘감히 학생이 교수에게’라든가, ‘듣보잡이 어딜 감히’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모두 시민으로 바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