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중사회문화 칼럼

대학가요제 폐지, 한 시대의 종언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대학가요제가 36년 만에 드디어(?) 폐지된다. ‘드디어’라고 하는 이유는 이미 폐지가 예견되어왔기 때문이다. 대중의 입장에선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이벤트고, 방송사의 입장에선 계륵 같은 존재였다. 위태롭게 연명해오다 마침내 방송사 측에서 산소호흡기를 떼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21세기를 상징하는 사건이고, 동시에 한 시대가 마감했음을 나타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지금 매체들은 대학가요제 폐지와 관련해서 스타등용문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졌다는 데에 주목하고 있는데, 사실 대학가요제의 가장 큰 문화사적 의미는 청년문화의 장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대학가요제가 등장한 1977년은 청년문화의 공백기였다. 그 전까지 청년문화를 대표했던 포크 통키타 계열 가수들은 이 즈음엔 이미 대형스타가 돼서 주류 상업문화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1973년 ‘그건 너’의 성공과 74년 영화 ‘별들의 고향’에 수록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등의 대히트가 그 기점이었다. 이후 쎄시봉 사단을 비롯한 통키타 가수들이 대거 솔로로 데뷔하며 활발한 연예활동으로 청년문화 기수라는 이미지에서 조금 멀어졌다.

 

외부로부터의 압력도 있었다. 유신정부가 통키타 히피 문화를 퇴폐 미국 문화라고 규정해 억압한 것이다. 이에 대해선 유신통제를 강화하려는 문화적 기획이라는 설, 미군 사령관이 대마초 문제를 대통령에게 제보했다는 설, 아들이 히피 친구들과 어울려 대통령이 진노했다는 설 등 다양한 추측들이 있다. 어쨌든, 포크 통키타를 중심으로 싹텄던 청년문화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위기를 맞았고 그에 따라 청년문화는 구심을 잃었다.

 

 

 

◆대학가요제, 청년문화의 기수가 되다

 

바로 그때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새롭고 참신한 문화에 대한 청년세대의 갈증은 컸다. 바로 그것이 대학가요제의 상상을 초월한 성공을 낳았다.

 

1회 대학가요제에선 서울대 밴드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라는 히트곡이 탄생했다. 그전까지 밴드하면 고고장 백밴드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일정정도 부정적 인식이 있었다. 유신정부가 밴드들을 퇴폐라며 탄압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런데 무려 ‘국립 서울대’ 학생들의 밴드는 이런 부정적인 느낌을 일소해버렸다.(참고로, SM의 이수만 회장도 샌드페블즈 출신임)

 

이후부터 청년문화를 담는 대표적 형식이 통키타에서 록밴드로 완전히 이전된다. 이때 형성된 흐름이 아직까지 이어져, 요즘도 청년의 순수한 음악하면 사람들은 밴드음악을 떠올린다. 샌드페블즈의 성공은 그후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들이 성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피버스의 ‘그대로 그렇게’, 라이너스의 ‘연’, 옥슨의 ‘불놀이야’ 등이 그렇다.

 

‘나 어떡해’는 사실 산울림의 음악이었다. 그들은 졸업생이었기 때문에 자격에 문제가 생겨 곡을 샌드페블즈에게 준 것이다. 그들은 애당초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대학가요제라는 것이 생겼고, 거기에 노래를 출품했더니 뜨거운 반응이 나타났다. 이에 고무된 그들은 마침내 산울림이라는 이름으로 독집을 내고, 한국 가요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된다. 대학가요제에서 산울림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이 없었다면 1970년대 말은 유신정부의 가요정화운동으로 우울한 암흑기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대학가요제의 성공은 이후 한국판 우드스탁을 표방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 등으로 이어졌다. 트로트 분위기의 유행가가 연말 가요대상을 독식하는 상황에서, 대학가요제는 캠퍼스 록밴드 붐을 가능케 했다. 이중에서 항공대의 활주로, 홍익대의 블랙테트라, 건국대의 옥슨 등이 특히 유명했으며 이런 흐름은 나중에 신해철의 무한궤도 등으로 이어졌다. 밴드음악 말고도 김학래`임철우의 ‘내가’, 이범룜`한명훈의 ‘꿈의 대화’,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노사연의 ‘돌고 돌아가는 길’ 등 주류 상업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모든 역사가 이번 대학가요제 폐지와 함께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붕괴된 청년문화

 

심수봉은 ‘그때 그사람’으로 2회 대학가요제에 참가했지만 본상을 받지 못했다. 탁월한 실력과 곡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너무 기성가수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것이 당시 대학가요제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당시는 주류 상업문화와 거리를 두려는 청년문화가 분명히 존재했고, 바로 그것이 대학가요제가 성공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2000년대로 접어든 이후 급격히 사라졌다. 이젠 상업문화와 구분되는 청년문화란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이 학교축제에 아이돌을 초청하는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대학생들마저 오디션 프로그램과 대형 연예기획사에 목을 매는 현상이 나타났고, 대학가요제가 붕괴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학가요제 폐지는 21세기 청년문화 실종의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며, 상업문화와 거리를 두려는 청년들의 자의식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나타내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저항적 청년문화, 순수한 청년문화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이다. 연예인과 돈을 향한 열망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