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드라마 영상 칼럼

상속자들, 이게 최선입니까?

 

김은숙 작가의 신작 <상속자들>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역시나 재벌2세와 신데렐라의 이야기다. 재벌2세의 성격은 언제나 그렇듯이 까칠하고 여주인공은 씩씩하다. 재벌2세는 거친 듯하지만 속에 상처가 있고 불쌍한 여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여주인공은 씩씩한 듯하지만 재벌2세와 또 다른 훈남 백기사에게 눈물 흘리는 약한 모습을 종종 들킨다. 재벌2세는 오만이 하늘을 찌르고, 여주인공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 하늘을 찌를 듯하던 재벌2세의 오만은 불쌍 순수 씩씩한 여주인공 앞에서 꺾인다.

 

여주인공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못 살고, 재벌2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사스럽게 산다. <시크릿가든>에서 현빈은 마치 리조트 같은 느낌의 집에서 살았고, 이번 <상속자들>에서 이민호 역시 마찬가지다. <시크릿가든>에서 하지원은 허름한 옥탑방을 그나마도 친구와 나눠써야 하는 처지였는데, <상속자들>에서 박신혜는 미국에서 무일푼 신세로 이민호와 만난다. 박신혜의 어머니는 장애인으로 재벌가에서 일하는데 과도하게 못사는 설정이다. 여주인공을 극단적으로 불쌍하게, 남주인공을 극단적으로 화려하게, 사골처럼 우려먹은 공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속자들>은 사골 드라마라 할 만하다. 정말 놀랍다. 그동안 재벌2세와 신데렐라 사이의 판에 박은 듯한 사랑이야기에 대해 그렇게나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버젓이 복사판을 내놓다니. 이쯤 되면 작가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상속자들>. 대놓고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겠다는 소리다. ‘난 재벌 이야기 또 할 테니 돌을 던지든 말든 알아서 해라’는 결기마저 느껴진다. 문제는 이게 통한다는 점이다. <상속자들>에 대한 인터넷 반응을 보면 대체로 긍정적이다. 김은숙 작가는 또 승리할 것 같다.

 

<개그콘서트>의 ‘시청률의 제왕’ 코너에선 ‘나 박대표야!’를 외치는 시청률의 제왕이 등장한다. 그는 도식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을 끊임없이 우려먹어 시청률의 제왕에 오른다. <상속자들>은 마치 ‘시청률의 제왕’의 로맨스 미니시리즈 버전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진부한 설정이 끝없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설정이 끝없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설정을 끝없이 성공시켜주는 건 여성 시청자들의 업적(?)이다. 화려한 왕자님에 대한 사무친 열망이 이런 사골 드라마를 승승장구하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주말엔 주부 시청자의 힘에 의해 막장 사골 드라마가 제목과 출연진만 바뀌어 끝없이 반복된다. 이쯤 되면 여성 시청자가 한국 드라마 퇴행의 원흉이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물론 <상속자들>이 단지 판에 박은 듯한 설정의 힘만으로 거저먹는 작품은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왕자님에게 사무친 시청자라 해도 아무 작품이나 묻지마로 좋아하진 않는다. 작품이 로망을 자극시켜주면서도 최소한의 완성도와 재미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일정 정도 의외성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가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상속자들>은 1,2회를 통해 등장인물들과 배경화면을 통해 압도적으로 화사한 비주얼을 선보였다. 김은숙 작가의 장기인 달달한 로맨스 정서도 살아났다. 결정적으로 속도가 충격이었다. 보통 1~2회는 해외 로케 오프닝 느낌으로 두 주인공의 인연 정도에서 끝나고, 3회쯤에 재회해 4~5회 정도에 화려한 남자주인공이 불쌍한 여자주인공한테 쩔쩔 맬 때 시청자의 탄성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상속자들>은 불과 2회에서 벌써 결정타를 날렸다.

 

“나 너 좋아하냐?"

 

여태껏 로맨스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속도전이다. 이런 전격 진군이 극에 힘을 불어넣었다. 상큼 화려 달달한 설정에, 보는 사람 답답하게 하지 않고 속 시원하게 질러주는 스토리. 확실히 재미는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사골은 사골이다. 동아시아에서 한국드라마는 설정이 거의 비슷하다는 지적이 이미 나오고 있다. 재밌지만 뻔한 드라마 목록에 또 한 편이 등재될 전망이다. <시크릿가든>에서 김은숙 작가가 쓴 현빈의 대사가 떠오른다.

 

“이게 최선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