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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경숙이경숙이아버지 유쾌상쾌경쾌하다

 

경숙이경숙이아버지 유쾌상쾌경쾌하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가뭄에 단비 같다고 해야 하나. 오랜만에 ‘좋으며’ 동시에 ‘재미도 있는’ 드라마가 나왔다. <바람의 나라> 후속으로 방영되는 4부작 미니시리즈 <경숙이 경숙이아버지>다. 막장 통속극 천하에 보기 드문 사람 냄새 나는 드라마다.


이 작품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경상도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천하의 한량인 장구재비 ‘낙동강 조절구’와 그 집안 이야기다. 조절구의 딸이 경숙이고, 조절구가 바로 경숙이 아버지다.


조절구의 집은 딸자식 교육도 못 시킬 정도로 가난하다. 경숙이는 항상 배를 곯으면서 궂은일을 해야 한다. 조절구는 기생집을 전전하며 고급 장구를 사기 위해 군수의 비위를 맞춘다. 그 마을엔 섬유공장을 운영하는 부자가 있다. 그 부잣집 도령이 경숙이를 괴롭히지만 그 집안의 위세 때문에 경숙이는 도령을 어찌 하지 못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구질구질’한 옛 이야기 같다. 하지만 드라마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경쾌하고 밝다. 그 때문에 사실성은 잃었지만 대신에 재미를 얻었다. 같은 시대의 민족적 비극을 다룬 <웰컴 투 동막골>도 낭만적인 우화처럼 그려졌었다. 이 드라마는 그 정도로 낭만적이진 않고 적당히 사실적이며 ‘오바’하지 않는 선에서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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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인물들 -


주요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매력적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연기자들도 매력적이다. 조절구 역의 정보석은 한량역을 그럴 듯하게 보여주고 있다. 깎은 듯한 귀공자를 주로 연기했던 정보석이 의외로 능청맞은 캐릭터에도 능숙하다. 장구가락이 손에 착 달라붙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노력도 많이 한 것 같다. 소리자락도 어색하지 않게 들려준다.


옛날에 <허준>에서 그저 그런 조신한 이미지로 나왔었던 홍수민도 여기서는 살아있는 모습을 보인다. 경숙이네 가족은 현실에서 붕 떠있는 것 같은 성격인데, 경숙이 아버지가 허황된 한량이라면 경숙이 어머니는 무한 낙관적이며 약간의 4차원끼가 있는 캐릭터다. 젊었을 때 매력적인 아씨로 나왔을 때보다 이 드라마에서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 물론 드라마가 그만큼 탄탄하기 때문이다.


정재순이 연기하는 경숙이 할머니도 은근히 재밌다. 할머니답지 않게 자기만 챙기는 모습이 얄밉다기보다는 우습고 정겹다. 이 할머니가 없었으면 경숙이네 집이 썰렁했을 것이다.


심은경이 연기하는 경숙이는 당연히 백미다. 이 드라마는 사투리의 성찬인데 심은경의 사투리가 그 중심에 있다. 아역의 사투리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심은경은 그동안 <태왕사신기>나 <태양의 여자>, 서태지 CF 등에서 주목 받았던 아역 배우다. 나는 사실 특별히 좋다는 생각은 안했었는데 이 드라마를 통해 생각이 변했다. 경숙이를 보고 있으면 마냥 유쾌하다.


그 외 인물들도 모두 살아있다. 막연히 배경으로 지나치는 사람이 없다. 모두들 개성을 가지며 극 속에서 저마다 자기 몫을 한다. 개그맨 출신 정성화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정성화는 초반엔 비중이 작았었지만 후반엔 경숙이 가족과 깊이 엮일 것 같다. 위의 네 명과 정성화, 그리고 마을 사람들, 경숙이의 친구들이 한국인의 삶을 재현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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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황에 얻는 작은 위안 -


2008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 <킷 킷트리지 : 아메리칸 걸>은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미국의 어려웠던 때를 따뜻하게 그려 호평을 받았었다. 한국 소녀 경숙이를 보고 있으려니 그 영화의 ‘아메리칸 걸‘이 생각났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대대적인 불황으로 접어들고 있다. 조선시대 이야기도 좋고, 귀족 사립학교 이야기도 좋고, 재벌가의 다툼 이야기도 좋지만 불황엔 이렇게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 위안을 얻는 힘이 될 수 있다.


이 드라마엔 막장 드라마의 치명적인 매혹도, 부자로맨스판타지의 달콤한 환상도, 액션 블록버스터의 활극도 없다. 그러나 따뜻한 웃음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 한국인이 있다. 한국인이 그려보이는 한국인의 삶이다.


막장 통속극과 오락 대작들 속에서 단비를 만난 듯한 작품이다. 과장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들을 보다가 이 작품을 보면 확연히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도 첨단과 퓨전이 횡행하다보니 이렇게 전통적인 것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신선한 것은 당연히 재미로 이어진다. ‘훈훈한 감동’, ‘작품성’ 따위로 이 드라마를 권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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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부작이 안타깝다 -


이런 드라마를 연장 방영해야 한다. 이 작품은 본의 아니게 전개가 매우 빠르다. 6.25 전쟁이 ‘앗’ 하는 사이에 끝난다. 달랑 4부작이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들의 특징이 빠른 전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경숙이 경숙이아버지>는 너무 빠르다.


이 작품은 <에덴의 동쪽>처럼 큰 이야기가 아니라 소소한 생활세계를 다룬 것이므로 좀 더 디테일이 풍부했어도 좋았다. 이런 기획이 4부작으로 나온 것은 그 ‘죽일 놈의’ 시청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시청자들이 이런 드라마를 자꾸 보고 화제에 올려줘야 막장 통속극이 아닌 기획안이 차후에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깔끔하고, 경쾌하고, 유쾌하다. 절대로 칙칙하지 않다. 재미를 보증한다. 신선한 것을 원하는 시청자들에게 권한다. ‘이쁘고’, ‘멋진’ 화면보다 사람냄새 나는 드라마를 더 원했던 시청자에겐 당연히 강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