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은 갈수록 흥미진진해면서, 동시에 이야기 거리도 많아지고 있다. 이번 주 들어선 미실과 덕만의 장시간 대화로 쉬어가는가 싶더니, 30회에서 다시 흥미진진 모드로 돌아갔다. 비담이 덕만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덕만과 김유신이 군대를 육성하기 시작하며, 문노의 귀환이 본격화된 것이다.

 

카이사르도 그랬고, 조조도 그랬다. 모두 무산민중의 군대를 자신의 것으로 육성했었다. 그것은 그 둘이 당대의 민중에게 희망을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만은 가야유민을 김유신의 군대로 육성하라 지시했다. 이것으로 덕만은 영웅의 면모에 더 가까워졌다.


더 중요한 것은 군대가 김유신 캐릭터의 강화에 이바지하리란 점이다. 군대를 조련하고 지휘하는 과정에서 김유신의 매력이 부각될 것이다. 주요 인물들 중 유독 존재감이 약했던 김유신이 군신(軍神)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시작된 셈이다. 더욱 강한 김유신은 더욱 강한 드라마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이번 주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다른 것이었다. 바로 미실의 눈물. 미실이 마침내 눈물을 터뜨렸다. 억울함과 서러움과 한이 서린 눈물이었다. 눈물 흘리는 미실은 안돼 보였다.



- 비극적인 영웅 미실 -


이전의 글에서 미실은 비극적인 영웅이 돼가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미실이 섭리와 신분의 굴레에 항거하지만,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실은 운명에 속박당한 자이면서, 그 운명을 거스르는 자다. 동시에 성골이 아니라는 신분에 속박당한 자이면서, 그 신분의 굴레를 거스르는 자이기도 하다.‘


이번 주에 미실은 덕만에게 아픈 곳을 찔렸다. 덕만이 미실에게 ‘어딜 성골에게 감히!’라고 신분 자랑을 한 것이다. 그것은 미실에게 평생의 한이었다. 이미 실권을 다 가졌으면서도 추할만큼 황후자리에 집착해온 미실.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신라는 원래 그런 사회니까. 그런 한계가 인간을 속박하지 않는 사회는 천 년 이상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다. 미실에겐 말도 안 되는 꿈인 것이다.


미실은 그런 불가능한 꿈을 이루려고 했다. 마치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리는 사람처럼. 동시에 북두칠성의 예언에도 저항한다. 반면에 덕만은 섭리와 함께 성골로 태어나 신분도 되찾고 예언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미실에게 남은 건 악전고투뿐이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에 맞서서 투쟁하는 자가 바로 비극적인 영웅이다. 덕만은 미실이 자신이 읽은 서역영웅전에 나오는 영웅 같다고 했다. 맞다. 덕만이 읽은 서역책이란 그리스영웅전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비극적인 영웅들은 운명과 신들에게 희롱당하는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결코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투쟁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의지’를 가진 영웅이 된다. 미실의 캐릭터는 이런 비극적 영웅성을 획득해가고 있다.



- 미실의 눈물, 장준혁의 절규 -


미실은 자유롭게 꿈을 펼치는 덕만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왜 난 성골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내가 쉽게 황후의 꿈을 이루었다면, 그 다음엔 (덕만처럼) 꿈을 꿀 수 있었을 텐데. 이 미실은 다음 꿈을 꿀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얀거탑>에서 잘 나가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최도영은 장준혁의 악착같은 삶과 악행을 비웃는다. 그러자 장준혁은 최도영에게 절규한다.


‘니들은 몰라! 너처럼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놈은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 수가 없어! 나한테 과장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


미실에게 황후 자리는 <하얀거탑> 장준혁에게 과장 자리와 같은 것이었다. 덕만과 최도영에게 그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미실과 장준혁에게 그것은 운명의 극복, 바로 ‘자유’를 의미했다. 하지만 운명은 미천한 그들이 그 자리를 향유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한다. 우리 국민들은 장준혁에게 열광했다. 지금과 같은 구도로 간다면 미실에 대한 감정이입도 여전할 것이다.


한편 덕만은? 막연히 옳은 말만 해서 얄미움을 샀던 <하얀거탑>의 최도영과는 달리, 덕만은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미실보다 나은 가치를 모색하고 있다. 실패와 굴욕을 마다 않는다. 이건 덕만도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캐릭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서로 대립하는 두 인물이 모두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구도가 성립한다. 이건 매우 강력하다. 두 인물의 대결자체도 흥미진진하고, 결국 섭리의 힘에 의해 한쪽이 스러져갈 때 발생하는 서사적 비극성도 강렬할 것이다. 설원도 미실과 함께 신분을 뛰어넘으려는 자다. 설원의 캐릭터가 강화되면 보다 이런 구도가 분명해질 것 같다.


<선덕여왕>은 이번 주 들어 덕만이 영웅인 이유와 미실이 악인인 이유, 그러면서 동시에 비극적인 영웅인 이유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꽃미남 F4와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재미를 줬었다면, 이젠 거대한 비극성까지 엿보이고 있다. <선덕여왕>, 2009년 최고의 작품이 될 듯하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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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감 가는 글입니다.


    미실의 눈물에서, 죽어라 노력해도 (?)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때의 절망감이 느껴지더군요.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2. 정말 미실이 부럽다고 하는 장면에서는 참 인상적이었어요.
    앞으로 내부적으로 무너지는 미실의 모습이 상당히 기대되네요. ^^

  3. 공감가는 글입니다.
    어제 미실이 "내가 쉽게 황후가 되었다면, 그 다음 꿈을 꿀 수 있었을텐데" 했을 때 찌릿했습니다.
    선덕여왕을 보면서 가장 소름돋는 장면이고 대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장준혁과의 비교도 참 절묘하네요. 태생적 한계의 극복은 현대에도 참 어려운 문제라서 그런지 멋진 대사이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4.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리가 아니라 '다음 꿈을 꿀 수 있는 자리'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쏟을 에너지를 자신이 꿈꾸는 신국, 나아가 한반도를 만드는 데 썼을 미실이니까요.

  5. 글 좋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