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회에서 드디어 공주가 된 덕만은 미실과 대등하게 마주 앉아 설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기세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아직은 우위에 있는 미실의 공세에 지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답을 했다.


여기까진 대하서사극의 일반적인 설정이다. 주인공이 타고난 용기로 압도적인 적에게 맞서는 모습. <선덕여왕> 29회는 여기에서 벗어났다. 미실에게 강단 있게 맞서던 덕만이 속으로는 혼란에 빠져 혼잣말을 하는 설정을 추가한 것이다.


겉으로 덕만은 자신만만한 표정과 단호한 어조로 미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하지만 미실이 반문할 때마다 속으로 ‘그러한가?’라고 혼잣말을 했다. 마지막엔 한껏 당당하게 자신의 통치관을 밝히고 나서 속으로,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맞는 거야?’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 리얼한 덕만, 신선한 덕만 -


이건 꽤나 신선한 시도였다. 보통 영웅서사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가치에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처음엔 방황도 하지만 일단 자신의 운명이 명백해진 후에는 오직 앞만 보고 달리며, 나쁜 무리들과 처절하게 싸울 뿐이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드디어 공주가 되어 미실에게 ‘무엄하다!’라고 허세까지 부리게 된 주인공에게 혼란스러운 혼잣말을 시켰다. 여태까지 이런 대하영웅사극이 있었던가?


약한 캐릭터와 신선한 캐릭터는 구분해야 한다. <선덕여왕> 초중반까지 덕만은 분명히 약한 캐릭터였다. 전혀 능동적이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민폐 캐릭터였던 것이다. 대하영웅서사극의 주인공이 꼭 만능천하장사일 필요는 없으나, ‘찌질한’ 민폐 캐릭터는 지나치게 약했다.


공주로 각성한 덕만이 미실 앞에서 혼잣말을 하며 우왕좌왕한 것은 그런 종류의 약함과는 달랐다. 그것은 다른 세계관의 표현이었다. 모든 것이 명명백백한 속에서 명백한 영웅과 명백한 악인이 투쟁하는 세계가 아닌, 영웅조차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는 보다 혼란스럽고 보다 모호한 세계. 덕만의 마음의 소리는 그런 세계관을 표현했고, 그것은 덕만을 약한 캐릭터가 아닌 신선한 캐릭터로 느끼게 했다.


또, 마음의 소리는 미실과의 대화를 리얼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람이 언제나 생각을 정돈하고 확신에 찬 상태에서 말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말과 생각이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뒤섞이고, 때로는 말만 앞서기도 한다. 말이 먼저 나가고 그 말에 의해 생각이 사후적으로 정리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덕만의 혼잣말은 이런 리얼함을 표현했다.


통상적으로 영웅서사극에서 영웅의 말이 언제나 결단과 확신의 표현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무의미하게 울고 짜던 캐릭터에서 드디어 ‘고민’이란 걸 하게 된 것도 진화였다.(물론 각성이 완전히 끝나고 성숙하면 이런 복잡성을 줄여야 한다. 주인공이 끝까지 혼잣말이나 하고 있으면 곤란하니까.)



- 반가운 덕만, 얄미운 미실 -


덕만이 드디어 신국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선덕여왕> 초반부 전쟁장면에서 가장 거슬렸던 것이 이 부분이었다. 미실 일당은 모두 자신들의 이익과 신국의 대의를 위해 싸웠는데, 덕만과 유신은 오로지 자신들의 안전만을 위해 싸웠다. 이것은 주인공으로서 실격이었다.


공주가 된 덕만은 이제 정반대로, 자신의 안락을 버리고 신국의 대의를 좆는 캐릭터로 진화하고 있다. 이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제 서서히 덕만이 권력을 잡아야 할 당위가 형성되고 있다.


반대로 미실이 권력을 잃어야 할 당위성도 만들어지고 있다. 29회에서 덕만의 위협을 받은 미실은 바로 대응한다. 그 첫 번째 방식이 바로 ‘감세’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부자감세’. 그것을 통해 신라의 상위 1%의 지지를 모아 덕만을 누르려 했다.


거기에 대해 덕만은 화랑의 인재운용 원칙에서 공평한 능력주의를 천명하고, 독점에 대한 지식공공성을 선포하는 것으로 맞선다. 이것으로 주인공이 권력을 잡아야 할 당위와 악당이 권력을 잃어야 할 당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천추태후>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나온다. 거란의 위협에 직면한 고려는 막대한 재정지출로 재정적자 상태에 빠진다.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고, 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선 조치가 필요했다. 천추태후는 부자증세를 결단한다. 그리고 귀족의 수탈을 막아 백성들을 돌보는 방식으로,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 한다. 썩은 귀족들은 맹렬히 반대한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은 부자감세로 그 썩은 귀족들의 편을 들었다.


두 사극이 모두 주인공의 적들에게 부자감세를 주장하게 한 것이다. 그것이 귀족과 미실을 얄미운 자들로 만드는 장치였다. 확실히 극중에서 그들은 얄미워보였다. 드라마 속에서 그들은 결국 패망할 것이다. 이것은 감세 논란이 뜨거운 우리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정치권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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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올리신 글 잘 읽고갑니다.
    행복한 한주 맞이하세요.

  2. 가끔 독자 2009.09.01 10:58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덕만의 혼잣말 속에 망설이는 내면...
    저도 참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역시 하재근님께서 놓치지 않으시는 군요.

    덕만이 망설이는 것은...
    그것은 이미 '투쟁하는 아래'의 위치에서 '성찰해야하는 위'의 위치에 왔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아래 위치에서는 거침없이 일을 벌이게 되지만,
    조직의 수장이 되면 신중에 신중에 거듭하면서 약간 유유부단해 보이기도하지요.

    어제의 그 독백은 덕만의 위치를 설명해주는 장치이자,
    인간적 영웅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제 미실과 덕만의 팽팽한 설전에서 보수세력과 노무현의 토론을 보는 듯했습니다.

  3. 오홀... 2009.09.01 13:21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저는 그냥 덕만과 미실을 보며 이상정치와 현실정치에 관한 담론을 재밌다고만 생각했는데 부자감세까지...역시 예리하시군요^^ 어제 덕만의 모습을 보며 통쾌했던 것도 고현정씨가 굴욕당하는 역할 얄미운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덕만 역할 배우의 약간 어설픈 연기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이 넘쳐흘렀구요. 고현정씨를 보면 우리나라 우리나라 여배우 기용을 젊고 예쁜 여배우 말고도 나이들고도 당당히 주연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매력의 여배우가 좀 더 많아졌으면 싶습니다.

    그나저나 미실의 행동 얄밉긴 하지만 두고두고 곱씹을만한 대사가 너무 많아요. 하재근님 글은 생각할거리가 많아서 좋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4. 미실의 말에 묘하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미실이 말하는 백성들처럼, 위에서 제시한 환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더 많은 고급 정보를 가진 쪽은 그렇지 않은 쪽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권력을 가지게 될 테니까요. 관심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의 정보를 찾아보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자신의 사고 및 행동의 방향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백성에게 희망을 주려 한다는 이상적인 목표마저도 술수의 일종으로 파악하고 있는 미실의 생각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덕만이 바람직한 목표와 또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게 된다면 미실의 생각도 그렇게 틀린 생각은 아니겠지요. 덕만도 지배층으로서 미실의 생각에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는 것을 봐도 이 드라마는 본문에 언급된 대로 정치적 측면에서 비교적 현실적인 드라마가 아닌가 합니다.

    더불어 저는 어제 미실이 그렇게 처참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덕만이 감히 어떻게 성골에 몸에 손을 대느냐는 호통을 칠 때 말입니다. 그래도 신라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위 관리인 미실이 나라를 위한 별다른 업적도 (아직은) 없는 덕만에게 그런 호통을 들으며 신분제 사회의 넘을 수 없는 벽을 갑자기 깨달은 듯한 당황한 표정을 지을 때, 그가 매우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뭐, 그간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불법적인 행태들을 감안하면 도덕적인 영웅에 의해 패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드라마상의 순리일 테지만서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