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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추노, 세경이 귀신에 씌인 업복이

 

역시 <추노>다. 원래 <추노>는 조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중반부에 천지호를 비롯한 조연들의 몰살로 그 흐름이 끊기는 듯했다. 막판에 이르러 다시 한번 조연들의 열연이 폭발했다.


23회에선 드디어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던 ‘그분’이 정체를 드러냈다. 일반적인 추측대로 좌의정의 수하였다. 좌의정은 ‘그분’을 이용해 소요사태를 만들어 정국을 일신하려 한다. 위기를 조장해 공포정치를 하려는 것이다.


노비들은 지금까지 거기에 놀아났다. 배운 자들, 가진 자들에게 처절하게 이용당했다. 그들에겐 희망을 가졌던 죄밖에 없었다. 순수하게 희망을 믿고 ‘그분’을 믿었던 노비들은 <추노> 막판에 이르러 배신당했다.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그분’이 정체를 드러내면서 노비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천민들의 떼죽음은 비극적이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비극성을 표현한 것이면서, <추노>라는 작품의 세계관을 표현한 장면이기도 했다. 신분 차별을 뛰어넘는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한 그들의 애타는 손짓. 이것이 <추노>가 그리고 있는 세계의 근원적인 비극성이다.


노비들의 떼죽음은 그런 비극성을 절절하게 표현해줬다. <선덕여왕>도 미실을 통해 이런 종류의 비극성을 보여줬다. 미실은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절감하며 눈물을 흘리고 결국 자결해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미실은 끝까지 화사했다. 반면에 <추노>의 노비들은 ‘그분’이 냄새난다고 할 만큼 추레한 모습으로 죽어갔다. 그래서 더욱 처절한 비극이었다.



- 공형진과 박기웅의 폭발, ‘화보키스’보다 애절한‘복복키스‘ -


 그동안 뭔가 터뜨려줄 것 같으면서도 임팩트가 2% 부족했던 업복 역의 공형진이 23회에 이르러 드디어 폭발했다. 양반 주인이 초복이를 팔아버렸단 말을 듣고 업복이가 폭주한 것이다.


업복은 ‘니들이 뭔데 사람을 마음대로 파느냐’고 절규하며 주인에게 낫을 휘둘렀다. 그리고 초복이 팔려간 집으로 가 초복을 구해낸 다음, 자신은 ‘그분’과의 약속대로 봉기군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를 홀로 보냈다.


분노 - 폭주 - 안타까운 이별로 이어지는 작은 드라마가 펼쳐진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역은 공형진이었다. 업복이란 캐릭터가 상당히 매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비중이 너무 적어 아쉬웠었다. 막판에 이르러 노비당이 폭발하며 비로소 업복이 전면에 부각됐다. 그리하여 공형진이 <추노>를 빛낸 신스틸러, 즉 주연 이상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조연 대열에 합류했다.


‘그분’ 역의 박기웅도 그렇다. 그동안 정의롭고 반듯한 청년 이미지였던 ‘그분’은 23회에 악마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노비들에게 냄새 난다며 지어보인 섬뜩한 웃음. 박기웅은 이 사악한 캐릭터를 생생하게 표현해 역시 <추노>의 빛나는 조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업복이와 초복이의 ‘복복키스’도 애처로웠다. <추노>는 송태하와 언년이의 ‘화보키스’로 얼룩졌었다. ‘화보키스’의 화사한 아름다움은 <추노>의 세계 속에서 뜬금없었다. 반면에 업복과 초복의 얼굴에 찍힌 ‘노’와 ‘비’라는 낙인이 연결된 ‘복복키스’는 <추노>의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한 이미지였다. 



- 세경이 귀신에 씌인 업복이 -


23회에서 업복은 그분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겨서 양반들을 종으로 부린다면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는 거 아니래요?”


세경의 귀신이 업복이에게 씌인 걸까? 이건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세경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사였다. 세경이는 자신이 경쟁에서 승리해 올라가면 다른 누군가가 패배자가 되지 않느냐고 했다.


반면에 <공부의 신>은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남을 밟고 올라서 일등대학에 가 ‘룰을 만드는 자’, 즉 지배자가 되라고 충동질했다. 그야말로 1차원적인 세계관이었다. 이런 드라마들이 있기 때문에 <지붕 뚫고 하이킥>이나 <추노>같은 작품이 더욱 빛난다.(비록 하이킥의 결말이 어이없긴 했지만) <공부의 신>의 이 말은 <추노>에서 좌의정이 역모를 꾀하던 조선비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억울하면 출세해서 네가 세상을 바꾸라는 말. <추노>의 정신은 그런 유혹을 거부한다.


역동적이고 비극적인 민초들의 이야기가 23회에 절정에 달했다. 막판에 기운이 빠지기 일쑤인 다른 드라마들과는 달리 <추노>는 결말에 어울리는 감정의 고조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조연들의 열연까지 빛난 것이다. 이야말로 명품사극의 면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