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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박정희 비서실장 김정렴, 기적을 상징하는 이름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지난 25일에 작고했다. 향년 96세다. 그는 식민지 시절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사해, 해방 후 한국은행 소속으로 화폐개혁에 참여했다. 재무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을 거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제안하자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니다라고 고사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라며 비서실장 자리를 맡겼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국방 등 다른 분야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정렴 회장이 경제를 맡는 비서실장이 됐다. 196910월부터 197812월까지 93개월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 역대 최장수 비서실장이다. 그 기간 종안 박 대통령이 직접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한 것은 10번 미만이라고 한다. 김정렴 회장이 회의를 주재해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스트레스로 탈모가 진행됐는데 청와대를 나오자 거짓말처럼 탈모 진행이 멈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박근혜 정부 시절 김기춘 비서실장 사퇴 이후 후임 비서실장 선임이 늦어진 이유가,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렴 같은 사람을 찾기 때문이라고 알려진 바 있다. 젊었을 때 접한 김정렴 비서실장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처럼 나라경제를 발전시킬 전문 관료가 아닌,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보위해줄 사람을 비서실장으로 선택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이 계속 일했다면 차지철 경호실장의 발호도 없었을 것이라고들 평가한다.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수시로 직보하면서 부대통령 행세를 했는데 김정렴 비서실장 재임시엔 경호실장이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선택한 비서실장들은 최순실이나 우병우 수석 등의 기세에 눌려지냈다. 박근혜 정부 이원종 비서실장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국회로 부르지 못해 망신당한 사건도 있었다. 제대로 일할 관료에게 힘을 실어준 박정희 대통령과, 그렇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의 차이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도 마지막엔 자기한테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차지철에게 휘둘렸다. 

박정희 정권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해야 한다. 권력 유지를 위해 사찰, 고문을 불사하는 정치적 성향의 조직이 있었고, 경제 개발에 매진하는 전문 관료 조직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후자를 대표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런 관료들에게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고, 방패막이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경제개발이 가능했던 것이다.

 

중화학공업화도 경제기획원이 반대했지만 비서실이 중심이 되어 밀어붙였다고 김정렴 비서실장이 회고한 바 있다. 경제기획원을 비롯해 경제학을 공부한 전문가들은 교과서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꺼려한다. 요즘 기획재정부가 재난지원금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 경제학 전문가들이 중화학공업화를 말도 안 되는 위험천만한 정책이라며 반대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적 결단을 내렸고 김정렴 비서실과 산업관료들이 밀어붙였다.

 

이러한 결단과 비상한 노력,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경제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김정렴이라는 이름은 그 기적을 떠올리게 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다.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 정부를 무조건 부정하고 조롱한다. 그러면 우리 산업화 역사의 온전한 계승이 힘들다.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 산업화를 이어나갈 때 우리 역사의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