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경은 비록 내세울 것 없는 처지지만 자존심만은 절대로 잃지 않는다. 또, 상당히 소극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녀가 먼저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황정음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였다.


그랬던 세경이 <지붕 뚫고 하이킥> 51회에서 처음으로 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도 고등학생인 준혁을 향해서였다. 바로 영어 때문이다. 세경은 암기과목은 그냥 외우면 되고, 수학도 풀이 보고 하면 되겠는데, 영어는 혼자 할 수 없다며 풀죽은 표정으로 말했다. 의지할 곳 없는 세경의 절박함이 그녀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남에게 손을 내밀게 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걱정됐던 부분이었다. 준혁이 세경을 위해 버린 참고서들을 세경이 들춰보기 시작했을 때 바로 떠오른 의문이, ‘어, 영어는 어떻게 하지?’였던 것이다.


다른 과목들은 대체로 성실과 노력으로 무식하게 파면 성적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영어만은 다르다. 영어는 조력자가 필요한 과목이다. 한 마디로 영어는 돈 들인 만큼 점수가 나오는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처럼 영어사전 씹어 먹는 식의 공부가 통하지 않는 요즘식의 듣기, 말하기 중시 풍토에선 더 그렇다.


그러므로 독학하는 세경이 영어에서 절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결국 공부보다 게임에 파묻혀 사는 영어 성적 35점짜리 고등학생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학생의 도움에 해맑게 웃는 그녀가 애처로웠다.



이 에피소드가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세경에게서 우리 서민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최근 교육양극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옛날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엔 거의 볼 수 없다. 서울대, 연고대를 잘 사는 집 아이들이 독식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바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강화된 것이 영어라는 과목이다. 특목고가 대두되면서 영어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영어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우리 서민들은 세경이 당한 것과 같은 절망에 빠진다. 그나마 세경 옆에는 흑기사 준혁이 있었지만, 우리 서민의 아이들 옆에 그런 흑기사는 없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최근 들어 영어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에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영어 폭탄을 터뜨렸다. 영어몰입교육 폭탄이 터지면서 국민들이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다.


잘 사는 집에 태어난 준혁에겐 영어 독선생이 특별 과외를 시켜준다. 황정음이 예쁘고 귀여운 표정으로 노래를 불러주며 영문법을 암기시켜주기도 한다. 세경이의 처지와 다를 것 없는 우리 일반 서민의 아이들이 그렇게 공부하는 아이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정부가 영어바람을 선도하면서 월 100만 원대의 영어 유치원이 성행한다는 말까지 들린다. 그렇게 영어 엘리트 코스를 밟는 아이들의 발음 앞에서 일반 서민의 아이들은 주눅이 들 뿐이다. 일단 주눅이 들면 아이들이 점점 영어 과목을 싫어하는 영어공포증 환자가 된다는 보고도 있었다.


시트콤조차 너무나 자연스럽게 영어라는 과목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 교육 지도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어를 무작정 강조하며 서민의 아이들을 절박한 처지로 내모는 것일까?



소득 상하위 사교육비 격차는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 영어가 강조되면 될수록 이 사교육비 격차에 의한 영어 격차가 커져, 교육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다. 교육양극화가 별개 아니다. 세경이와 신애처럼 태어난 아이들이 단지 돈이 없다는 죄로 좋은 학교에 갈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다는 얘기다.


유명 대학들도 영어 강화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영어중심으로 신입생을 뽑는가 하면, 학생들에게 영어를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영어몰입강좌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영어엘리트 교육을 받은 학생들만 유리해진다.


시트콤 속에서 준혁이라는 흑기사를 만날 수 있었던 세경과는 달리, 우리 현실 속의 수많은 세경이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서울의 한 빈민촌에 사는 여학생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더니, 학원가는 것이라고 답한 인터뷰가 있었다. 이런 아이들이 영어 특별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과 경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에서 교육지도자들은 절대로 영어선발을 강조해선 안 된다. 영어를 중심으로 학생을 배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수많은 세경이들의 미래를 박탈하는 짓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날로 영어가 강화되고 있고, 그에 따라 영어사교육 비용이 치솟고 있다. 교육이 절망하는 세경이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현실은 엄혹하다.


현실이 엄혹한 만큼 드라마가 더 애틋했다. 그렇게 자존심을 지키던 세경이가 처음으로 남에게 손을 내밀고, 어린 남학생에게 선생님이라고 하며 드디어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을 해맑게 기뻐하는 모습이 그랬다. 그리고 그런 세경을 도와주는 것이 너무나 기쁜 준혁의 모습이 풋풋했다. 둘의 마음이 예쁘게 그려지는 모처럼 달콤한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기회를 갖지 못할 우리 현실의 세경, 신애가 자꾸 눈에 밟혀 아픈 이야기이기도 했다.


P.S. 해리가 영어학원에 가는 것을 부러워하던 신애를 줄리엔이 도와줘, 해리가 도리어 신애를 시샘한다는 에피소드를 첨가하는 것도 하이킥다운 일이겠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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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무도 안지나간 눈을 밟은 느낌이로구나...

  2. P.S.의 내용은 실제로 방송될 수도 있을법한 내용이네요.
    속 깊은 글 잘 읽었습니다.

  3. 대갈마왕 2009.11.20 11:10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줄리엔이 세경을 도와주는 것은 어떨까요... 진정한 흑기사의 풀옵션같은데..

  4. 김현석 2009.11.20 14:27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재근아 니가 신문에 칼럼이라고 썼던거 보고 왔는데... 재근이는 1971년생인데 글쓰기가 초등학생 억지 수준인데... 문화평론가라고 자신을 밝히기에는 챙피하지 않아? 너처럼 글을 발가락으로 쓰는 애는 정말 진심으로 처음봤어. 그래도 밥벌이가 되나보지? 정말 논리란게 머리속에 있긴 있나싶다..

  5. 지나가다 2009.11.21 13:37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하이킥에 그런에피소드가 있었군요. 근데 님 말을 들으니 정말로 정말 우리 사황에 맞아떨어지는거 같아요. 니 글을 보면 문제점의 본질을 찍는거 같애요. 혹시 시간 되시면 학생의 두발규체에 대해서 글써주시면,,,,,,

  6. 초딩엄마 2009.11.22 11:23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저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근데,,,,요즘은 초딩때부터 그냥 외우는 암기 과목과 풀이보고 푸는 수학까지 누군가 도와주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