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경이 마침내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세계의 껍질을 깨고 나와 성인이 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광활한 세상과 혼자 마주한 것이기도 했다. 하루의 휴가와 한 잔의 차고 쓴 커피가 바로 그런 세경의 성인식이었다.


<지붕 뚫고 하이킥> 76회는 영화를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비주얼로 시작했다. 내가 아저씨가 아니라 소년이었다면 틀림없이 가슴이 뛰었을 이미지였다. 그것은 모처럼 지훈-세경이 함께 그려진 아픈 모습이었다.


세경은 지훈의 새 옷을 가져다주러 병원을 찾아간다. 하지만 막 수술을 마친 지훈은 지쳐서 눈을 감고 있다. 세경은 지훈의 옆에 서서 지훈이 눈을 뜨길 기다리다가, 끝내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쪽지 한 장 남긴 채 조용히 발길을 돌린다.


이 에피소드에서 세경이 지훈 옆에 서있는 장면은 틀림없이 제작진이 작심하고 찍었을 아름다운 샷이었다. 아픈 눈빛으로 지훈을 바라보는 세경의 얼굴 클로즈업샷도 그랬다. 특별히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기 위해 빛의 설계에도 정성을 기울인 기색이 역력했다.


그 샷은 <지붕 뚫고 하이킥> 76회의 분위기를 순수하고 아픈 동화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세경의 차가운 성인식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했다. 너무 슬프기만 해 질척해지지 않도록 그림처럼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면서,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워서 더욱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는 세경의 성인식은 그렇게 시작됐다.



- 세상으로 나오다 -


먼저 오현경이 세경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스타일, 말투 모두 변하지 않고 기존의 것을 고집한다는 것. 세경의 그런 고집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커피다. 남들 다 먹는 커피를 세경은 여태 안 먹고 있었다. 그것이 세경이 지켜온 세계였다.


그런 세경에게 오현경은 휴가를 주며 나들이를 권한다. 드디어 세상에 나온 세경에게 도시는 낯설 뿐이다. 두리번거리던 세경은 지훈과의 추억을 상기한다. 지훈이 자신에게 권했었지만 마시지 못했던 커피. 그것을 떠올린 세경은 혼자서 커피를 산다. 커플들이 함께 커피 마시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세경은 마침내 커피의 맛을 본다. 그것은 쓰디 쓴 블랙커피의 맛이었다.


그때 황정음이 나타났다. 세경은 이 쓴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황정음은 어디로 갈 지 몰라 하는 세경을 도시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세경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청춘을 경험한다. 세경과 정음의 작은 파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정음은 세경이 연모하는 지훈의 연락을 받고, 혼자 남겨진 세경은 ‘인형의 꿈’이라는 아픈 노래를 쓸쓸히 부른다. 정음이 떠난 후 세경은 화려한 조명에 빛나는, 그러나 차가운 푸른빛의 도시 속에 홀로 선다.


텅빈 집으로 돌아온 세경은, 차갑게 식은 쓰디 쓴 커피를 꺼내 쓴 맛을 참으며 모두 마신다. 커피를 다 마신 세경은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녀의 표정은 커피의 쓴 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아픔을 머금은 것처럼 보인다.



- 차고 쓴 성인식, 차고 쓴 시트콤 -


고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세경이었다. 76회에서 세경이 마침내 도시로 나가 커피를 마신 것은, 지금까지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의례였다. 스스로 치른 성인식이었던 것이다. 사랑니 에피소드의 눈물 한 방울로 시작된 세경의 성인식은 76회의 차고 쓴 커피 한 방울로 절정에 달했다.


아빠와 동생이 함께 하는 목가적이고 마냥 따뜻한 세상에서 나와 알게 된 사랑과 바깥세상. 그것은 외로움과 차가움이었다. 세경이 인상을 찡그리며 다 마신 커피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먹은 빨간 약과 같았다. 그녀가 마침내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녀에게 추운 겨울날 차갑게 식은 블랙커피 같기만 한 세상으로. 이제 세경은 다시는 마냥 따뜻하기만 했던 과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어른이 됐으니까.


이것이 시트콤 여주인공의 성인식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시트콤은 연기대상 후보에도 아예 끼지 못한다. 한국에선 시트콤을 웃기기나 하는 쇼오락 프로그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요즘 정극은 신데렐라 트렌디, 막장 드라마의 홍수다. 성인식은커녕 시청자까지 유아로 만들고 있다. 정극에서라면 세경은 행복한 웨딩드레스를 입을 것이다.


정극조차 그런 식인데, 일개 시트콤에 불과한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세경이 맞은 세상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극 속에서 세경이 빨간 약을 먹으며 세상과 만났다면, 시청자에겐 이 시트콤 자체가 세상과 만나게 하는 빨간 약과 같다. 차갑고 쓰디 쓴 괴상한 시트콤을 우린 보고 있는 것이다. 너무 냉정하고 차가워서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는 시트콤. 76회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그런 성격을 잘 드러낸 에피소드였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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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재호 2009.12.29 07:47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저도 성인식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근데 불렀던 노래는 인형의 꿈 아니었나요?
    짝사랑의 슬픔을 노래하는 .. 대표적인 노랜데..

  2. 김영화 2009.12.29 13:07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멋진 글 감사합니다.
    읽었던 리뷰중 가장 공감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아...
    정말이지 헤어나오기 힘든 이 괴상한 시트콤이
    날마다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지만 그만큼 마음이 괴롭습니다.
    외면하고 싶었던 우리네 모습들을
    너무나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요...

  3. 사극 빼고는 드라마는 물론 텔레비젼도 잘 안 보는 편인데
    지붕뚫고 하이킥은 전작에 비해서도 수준이 높아지고
    우리나라 시트콤 수준을 한껏 높인 거 같군요.
    76회는 좀 재미없네 생각했는데, 이 글 읽고 다시 보니 와 소리 나네요.
    게다가... 글 쓰신분은 해설까지 멋지게 해 주시니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4. 요즘엔 진짜 한국드라마는 쓰레기같은게 많아서 안보는데, 무한도전 하이킥만 유일하게 볼만하네요
    역시 하이킥 연출하시는분이 보통분이 아닌줄은 순풍산부인과때부터 알아봤다는 ㅎㅎ

    하이킥은 시트콤답지 않게 웬만한 드라마보다 완성도도 훨씬 높고 현재세태를 잘 반영하며 어느정도 메세지까지 갖춰서 안볼수가없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