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부산행’과 같은 19일 만의 기록이다. 광주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1990년대도 아닌 2017년에 천만 고지에 올랐다는 점이 놀랍다. 과거 ‘부활의 노래’(1991), ‘꽃잎’(1996), ‘박하사탕’(2000), ‘화려한 휴가’(2007), ‘26년’(2012) 등이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뤘지만 ‘화려한 휴가’의 680만 관객이 최고 기록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80년대에 ‘광주사태’라고 불렸고 감히 메이저급 대중문화 콘텐츠로 만들 수 없었다. 대학가에서 위르겐 힌츠페터 등 외신 기자들이 찍은 영상이 암암리에 상영되던 시절이다. 대학 주변 길거리에 광주 피해자들의 사진이 기습적으로 전시되다 경찰에 의해 철거되기도 했다. 적나라하게 찍힌 피해자들의 모습은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군사정권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9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광주는 여전히 금기였다. 88년에 메이저 상업영화가 아닌 영화 운동단체 장산곶매 제작 16mm 소형 영화로 ‘오! 꿈의 나라’가 나왔는데, 민주화 이후임에도 당시 정부는 장산곶매를 탄압하며 상영을 막았다. 91년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가 개봉했지만 심의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비운의 작품으로 남았다.
김영삼 문민정부에 이르러서야 ‘꽃잎’이 정상적으로 개봉할 수 있었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있었다. 이때 만약 광주민주화운동을 제대로 그렸으면 역사적인 흥행열기가 나타났을 것이다.
광주의 모습이 그려진 건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이었다. 바로 95년 SBS ‘모래시계’다. ‘택시운전사’에서 외부인이 우연히 광주에 가 현장을 목격하는 것처럼 ‘모래시계’에서도 최민수가 우연히 광주에서 그 일을 목격한다는 설정이었다. 이때 드라마 화면과 힌츠페터 등이 찍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80년 당시의 실제 기록 필름이 교차 편집되면서 그날의 광주가 마침내 메이저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많은 청년들이 광주라는 말만 나와도 눈물을 쏟던 시절이다. ‘모래시계’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말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다.
이 당시만 해도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다. 그 시대정신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이르면 많은 국민이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 민주화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정착된 것으로 여겨져 민주주의 이슈 자체를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측면도 있다.
광주를 정면으로 그린 ‘화려한 휴가’는 바로 이 시기에 당도했다.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킬 무렵에만 개봉했어도 엄청난 흥행을 했겠지만, 2007년이 되자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시민들이 열성적으로 관람운동을 해도 680만 관객에 불과했다. 그해 말 압도적인 표차로 ‘이명박근혜’ 시대의 서막이 열린다. 국민이 경제개발을 선택한 것이다.
‘이명박근혜’ 시대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분명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전혀 정착되지 않았고, 권력자들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역사가 후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경제문제도 나아지지 않았다.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이 더 커져갔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내실화해야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우리 사회에 활력이 다시 살아날 거라고 여기게 됐다.
민주화가 다시 시대정신의 일부로 등극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압도적인 표차로 탄생됐다. 의석수가 훨씬 많은 야3당이 사사건건 문재인 정부의 앞길을 가로막지만 국민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지지를 보낸다. 바로 이때 ‘택시운전사’가 개봉했다.
영화가 시대정신의 흐름을 탄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면서, 이전 정부가 그 역사적 의미를 격하시키려 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광주를 복권시키는 것엔 이전 정부와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는 선언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관객들이 물밀 듯이 극장에 몰려 간 것이다. 마침 전두환 전 대통령 측도 광주 폄하와 회고록 논란 등으로 대중의 반발심에 부채질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2007년에 개봉한 광주민주화운동 소재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사태가 터졌다. 사실 개봉 전까지만 해도 일부에선 소재의 진부함 때문에 흥행을 부정적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정신은, 국민은, 광주가 상징하는 가치가 절대로 진부하지 않다고 했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이 바로 ‘지금/여기’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는 가치라고 말이다. ‘택시운전사’ 천만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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