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살아있다’는 저 유명한 ‘아내의 유혹’을 쓴 김순옥 작가의 작품이다. 김순옥 작가는 ‘아내의 유혹’에서 얼굴에 점찍고 다른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희대의 설정으로 막장드라마계의 전설이 됐다. 그후 ‘천사의 유혹’, ‘왔다! 장보리’, ‘내 딸, 금사월’ 등을 줄줄이 히트시켰다.
김순옥 작가의 작품은 악녀 응징 복수극이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속도감으로 극의 부실함을 상쇄한다. 또, 말도 안 되는 악행을 저지르는 악녀의 존재감이 엄청나다. 김서형, 이유리 등이 김순옥 표 악녀로 스타덤에 올랐다. 선과 악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복수도 특징이다. 장서희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복수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변우민처럼 처절하게 망가지는 남편이나 캔디 캐릭터, 출생의 비밀, 기업의 경영권 다툼 등도 자주 등장한다.
‘언니는 살아있다’는 이 모든 요소들을 대거 투입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다. 악녀가 무려 3명이나 등장한다. 착한 여자도 3명이다. 강하리(김주현)은 캔디 캐릭터, 김은향(오윤아)는 선과 악을 넘나드는 복수, 민들레(장서희)는 중년로맨스 코드를 맡았다. 거기에 출생의 비밀로 고통 받는 착한 남자와 그의 자리를 빼앗은 또 다른 남자까지 있다.
이렇게 대립구도가 복잡하다보니 극의 응집력이 약했다. 초반에 한 명 한 명의 사연이 나열되는 과정에서 시청자는 누구에게 감정이입해야 할 지 혼란을 느꼈다. 안내상이 막장드라마 특유의 황당 캐릭터로 나와 실소를 유발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극이 찰기 없이 풀어져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김순옥 작가 특유의 속도감으로 모든 문제들이 봉합되기 시작했다. 후반부로 접어들어 악인들의 비밀이 하나씩 발각되면서 동시간대 1위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지난 주말엔 박광현이 과거 변우민처럼 처절하게 복수 당하는 남편의 모습으로 주부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제작진은 선녀 악녀 3대3 대결 구도를 설정한 것에 대해 ‘워맨스’ 코드로 설명한다. ‘빽 없고, 돈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세 여자들의 워맨스’라는 것이다. 브로맨스는 형제(brother)와 로맨스(romance)의 합성어로 요즘 대표적인 흥행코드다. 워맨스는 브로맨스의 반대지점에서 나온 말로 여성(Woman)과 로맨스(Romance)의 합성어다. 여성들의 우정, 독립성, 주체성 등을 상징한다. 그런데, ‘언니는 살아있다’가 정말 여성의 주체성을 고취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드라마나 영화에선 남성이 사건을 이끌기 때문에, 여성이 중심인물로 대거 등장하는 것 자체는 어쨌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언니는 살아있다’는 특별히 실험적인 시도를 한 것이 아니라 주말드라마의 일반적 공식을 따랐다는 한계가 있다. 또, 여성들의 대립이 마치 ‘장희빈’처럼 자극적인 흥행 코드로 동원된 점도 한계다.
‘장희빈’에서 숙종이 최종 판정자인 것처럼 ‘언니는 살아있다’에선 손창민이 최종 심판자 회장님이다. 여성들이 남성을 속이며 지지고 볶고 ‘개싸움’을 벌인 끝에 이성적 판단력을 갖춘 가부장이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설정인 것이다. 이런 구도는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워맨스’를 내세우면서 여성의 뒤통수를 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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