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영한 KBS '란제리 소녀시대‘는 8부작 소품이라서 ’땜빵용‘이란 평가를 받았었다. 유명 스타도 없이 신인들로만 주연급을 채워서 더욱 저평가 됐다. 보나, 이종현 등 아이돌이 캐스팅 된 것도 기대치를 떨어뜨렸다. 첫 회 방영 후엔 사투리 연기가 어색하다며 혹평 일색의 반응이 나왔다.
더 큰 문제는 급조된 유사품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작품은 1979년 대구를 배경으로 고등학생들의 학교생활과 집안 분위기를 다뤘다. 시대상을 보여주는 각종 소품과 당대의 히트곡들이 나왔다. '응답하라 1988‘ 등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익숙한 설정이다. 청춘 남녀의 로맨스에 더해 부모와의 관계, 동네 분위기 등을 공들여 묘사하는 점도 비슷했다. 사투리까지 유사하다보니 ’짝퉁‘ 취급을 받으며 냉대 당했다.
하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란제리 소녀시대’만의 의미가 살아났다.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청춘, 추억, 가족애, 로맨스 등 다양한 요소가 나오지만 빠진 게 있다. 바로 사회성이다.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인 1994년은 비록 80년대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대학생들의 사회의식이 살아있을 때였다. 하지만 드라마는 대학생들의 한없이 밝고 낭만적인 모습만을 그렸다. 마치 80년대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에서 그려진, 사회적 현실과 분리된 대학생의 낭만처럼 말이다.
고등학생들을 내세워 더욱 ‘란제리 소녀시대’를 짝퉁처럼 느껴지게 한 ‘응답하라 1988’도 그렇다. 시대상의 촘촘한 묘사가 이 작품의 특징이고 미덕이다. 1988년이면 사회적으로 뜨거운 시기였다. 87년 6월 항쟁은 지났어도 여전히 사회개혁의 목소리가 분출했다. ‘빌딩이 높아지면 그 그림자도 길어진다’는 ‘수사반장’ 최불암의 대사처럼 압축적 고도성장에 따른 사회 모순도 있었다. 하지만 ‘응답하라 1988’에 공들여 표현된 시대상에선 그런 그림자가 삭제됐다. 대신에 목가적이고 여유로운 중산층의 정서와 실제보다 과장된 지역공동체 풍경만이 그려졌다. 물론 주인집과 셋방살이의 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전원일기’의 도시 중산층 버전 같은 느낌이었다.
‘전원일기’는 80년대에 우리 농촌을 따뜻하고 이상적인 공간으로 그렸고, 농민의 고통을 묘사했을 때는 불방조치 되거나 제작진이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었다. ‘응답하라 1988’은 바로 그런 ‘전원일기’처럼 우리 서울을 마냥 따뜻한 공간으로 그렸다. 그래서 이상향 같은 느낌이 생겨났고 시청자가 이 드라마를 보며 위안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란제리 소녀시대’는 바로 이 부분에서 ‘응답하라’ 시리즈를 넘어서는 성취를 이뤘다. 처음엔 마냥 순수하고 밝은 복고 드라마처럼 시작했지만, 그런 순수함 너머에 존재했던 지배 시스템의 폭압성까지 함께 담아낸 것이다. 그저 따뜻한 한 마을 같지만 중상층과 하류층 사이에 가로놓여진 보이지 않는 장벽. 하류층을 바라보는 지배 시스템의 차가운 시선. 우리 전통사회의 여성차별 문제까지 다양한 지점들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거운 사회파 작품만은 아니었다. 한없이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절로 미소 짓게 하고 아련한 추억에도 빠지게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8편으로 끝난 것이 아쉽고 아직도 여운이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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