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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찬란한유산 한효주 눈물의 여왕이 되다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이후 오랜만에 볼 만한 주말 드라마가 등장했다. <찬란한 유산>이다. 이승기가 나쁜 남자로 나온다고 해서 그동안 화제가 됐었던 작품이다. 별로 관심 가는 뉴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동안 신경 끄고 있었다.


우연히 보게 됐는데, 기대 이상이다. 흡입력, 속도감, 안정감 모두 장난이 아니다. 주말 드라마라고 늘어지거나 진부하지 않다. 충분히 깔끔하고 쿨하다.


여기선 이승기가 개차반 망나니로 나온다. 이승기가 개차반인 이유는 그가 돈보다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이런 사람들은 승승장구하지만, 다행히도 순박한 드라마 속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사람들은 인간 취급을 못 받는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이승기의 할머니인 반효정과 한효주다. 이들은 인간중심의 따뜻한 가치관을 상징한다. 반효정은 준재벌이고 한효주는 폭삭 망한 집 딸이다. 한효주가 이승기와 만나 애증의 관계를 맺어가며, 반효정과 만나 신데렐라가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설정이다.


재벌가 왕자님과 재투성이 신데렐라. 너무나 많이 봐 물리고 물린 설정이다. 동시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보편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처럼 양극화가 심해져가는 사회에선 성공담, 출세담, 일확천금, 인생역전극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다.


<찬란한 유산>에선 아무리 불황이라도 그것과 상관없는 5%는 늘 있게 마련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맞는 말이다. 더 넓게 잡으면 10%다. 이 정도가 한국에서 안정을 약속받은 계층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위치는 점점 불안해지고 있기 때문에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경향적으로 커지며, 그에 따라 신데렐라극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자, 이런 이유에 의해 신데렐라극이 쏟아지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모든 드라마의 차별성이 다 사라지는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비슷한 설정이라도 어떻게 표현하고, 변주하느냐에 따라 그 생동감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날 것이다.


- 눈물의 여왕 한효주 -


<찬란한 유산>은 뻔한 신데렐라극을 신선하게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극이 진부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재밌다. 뻔한 설정임을 분명히 아는 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그 중심에 한효주가 있다. 한효주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는 역할이다. 설상가상으로 정신지체아인 동생까지 딸려있다.


드라마 초반부에 한효주는 툭하면 눈물을 쏟아냈다. 비극적이고 절박한 상황이 연이어 닥쳤기 때문이다. 자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혼자서 서럽게 울기도 하고, 동생을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눈물의 연속이었다.


드라마가 출발하자마자 여주인공이 대뜸 울어댔던 작품으로는 윤아의 <신데렐라맨>이 있다. 여기서 윤아의 우는 모습은 전혀 극을 살려주지 못했다. 윤아는 최근 눈물을 거두고 밝아진 모습을 보이며 매력이 살아나고 있다.


반면에 한효주의 눈물은 극을 살렸다. 최근 김남주의 눈물연기도 호평 받고, 윤아의 눈물연기도 있었고, 김아중도 심심치 않게 비애에 찬 모습을 보이고, 이번 주엔 김선아도 눈물연기를 보인 바 있다. 이중에서 한효주의 눈물이 단연 발군이었다.


한효주의 존재가 이 뻔한 드라마를 구태의연함이나, 칙칙함, 식상함 등으로부터 구원하고 있다. 물론 한효주의 눈물이 그의 엄청난 연기력 하나로 그런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 연기자의 연기란 언제나 극의 힘을 바탕으로 하기 마련이다.


극에 힘이 있으면 그 속에서 연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극 자체가 설득력이 없거나 구성이 맥 빠지면 연기도 그래보인다. <찬란한 유산>의 초반부는 한효주를 눈물의 여왕으로 만들 만큼의 힘이 있었다.


- 재밌는 드라마, 찬란한 유산 -


이 드라마는 한효주가 처한 절박한 상황을 워낙 잘 묘사했다. 부잣집 공주였던 한효주가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 그야말로 ‘제대로’였다.


<남자이야기>가 초반에 남자의 절절한 추락을 보여줬다면, <찬란한 유산>은 그 여성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드라마는 그 다음에 갈린다. <남자이야기>는 어두운 복수극으로 갔고, <찬란한 유산>은 트렌디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가고 있다. 요즘 대중의 입맛엔 <찬란한 유산>쪽이 더 맞아 보인다.


또 <찬란한 유산>은 요즘 뜨는 드라마의 특징인 경쾌함과 속도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주말드라마인데도 사건전개가 늘어지지 않는다. 극초반의 절절함과 바로 이어진 경쾌함은 이 드라마에 강력한 흡인력을 제공했다.


한효주가 신데렐라가 되는 과정도 설득력이 있다. 반효정과 한효주는 처절한 고생을 통해 돈이 무서운 존재라는 걸 체득한다. 인간중심 정서도 같다. 코드가 맞는 것이다. 그래서 반효정은 코드 유산상속을 단행한다. 이 과정이 무리하지 않게 묘사 되어 있다.


돈과 눈물, 그리고 신데렐라가 있는 판타지. 그 핵심에 있는 것이 한효주다. 한효주의 눈물은 극초반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마법의 묘약이었다. 그리고 그 바탕엔 <찬란한 유산>이라는 극 자체의 힘이 있다. 오랜만에 볼 만한 주말 드라마다.